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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활의 눈으로 신화를 읽는 철학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82호 21면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
김헌 지음
을유문화사

읍참마속(泣斬馬謖), 당랑거철(螳螂拒轍) 같은 고사성어가 서양엔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서구에선 그리스 로마 신화가 이야기 보물창고다. 이 책을 읽으면 실감하게 된다. 네 글자에 방대한 이야기를 압축한 고사성어처럼 그리스 로마 신화는 세상 만물에 꾹꾹 사연을 새겨넣었다.

공작 날개에 달린 눈동자 무늬는 여신 헤라를 돕다 죽음을 맞이한, 눈이 100개 달린 괴물 아르고스와 연결된다. 제우스의 머리를 쪼개고 나온 여전사 아테나는 풍요의 여신이기도 하다. 아폴론과 아르티메스는 우리 전래 동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와 판박이. 한 떨기 꽃에도, 쉬파리가 끈질기게 소의 주변을 맴도는 데에도 신과 영웅들 이야기와 질투와 분노가 스며들어 있다.

저자는 철학자다. 그는 “신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뜻에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로 집필 동기를 설명했다. 인간의 근원적 호기심을 채워준다는 점에서 철학과 신화는 동의어다. 그는 문화의 원형질인 신화를 현미경이자 돋보기 삼아 우리 일상을 들여다본다. 심하게 어질러진 아들 방을 통해 카오스와 코스모스를 설명하고, 제우스가 권좌에 오르는 모습을 현실 정치의 협치와 분권에 빗댄다. 21세기를 사는 한국 철학자의 시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해석한 게 반갑다. 신화와 연결된 고대 문헌을 원문과 함께 소개하는 등 희랍어·라틴어에 정통한 저자가 원전을 직접 연구한 내공이 곳곳에 묻어난다.

전체 4부의 글이 모두 90편. 한꺼번에 읽는 것보다 하루에 한 편씩 서너 달에 걸쳐 야금야금 읽어도 좋겠다. 읽다 보면 마블 영화와 소설 ‘해리 포터’ 시리즈가 모두 그리스 로마 신화 변주곡임을 거듭 느끼게 된다. 이 책 90편 속엔 900편 이상의 영화 스토리가 담겨 있다.

아파트나 자동차 브랜드 이름을 짓는 사람에겐 뜻밖에 실용서가 될 수도 있겠다. 밤의 여신 뉙스, 기만의 여신 아파테, 노고의 신 포노스, 싸움의 신 마코스, 전투의 신 휘스미네 등 신들의 이름은 뭔가 있어 보인다. 게다가 의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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