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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RM이 좋아하는 영국 최고 화가, 지폐에 등장한 까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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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호 26면

J.M.W.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 

 J.M.W.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1838), 캔버스에 유채, 91x122㎝. [구글아트프로젝트]

J.M.W.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1838), 캔버스에 유채, 91x122㎝. [구글아트프로젝트]

런던 내셔널갤러리의 트윗 [트위터 캡처]

런던 내셔널갤러리의 트윗 [트위터 캡처]

“오늘 우리는 RM이 특히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J.M.W. 터너라는 걸 알았어요! 터너에 대해 더 알고 싶고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들 몇몇을 보고 싶다면 여기로 오세요.”

세계 굴지의 미술관 런던 내셔널갤러리는 지난해 여름 이런 글을 공식 트위터에 올렸다. 그 트윗에는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풍경화의 거장인 조세프 맬로드 윌리엄 터너(1775-1851)의 그림들 중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한 대표작 ‘전함 테메레르’(사진1)와 ‘비, 증기, 속도-대서부철도’(사진3)와 ‘개밥바라기 별’의 이미지가 담겨 있었다. 당시 RM은 방탄소년단의 영국 BBC 라디오1 인터뷰 중 “특히 좋아하는 미술가가 윌리엄 터너다. 내셔널갤러리를 방문했을 때 그의 그림이 많이 있었다. 꿈이 이루어지는 기분이었다”라고 말했다.

터너는 2015년 설문조사가 증명하듯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미술가다. 영국은 현대 이전에는 서양미술계의 뒤쳐진 변방에 불과했고, 정치경제적으로 ‘대영제국’의 위상에 오른 19세기까지도 그랬다. 그런 와중에 터너는 현대 영화 장면을 연상시키는 드라마틱한 구도, 공기에 빛이 어른거리는 듯한 화면을 그려내는 솜씨, 격변하는 문명의 속도감을 표현해내는 거친 붓질 테크닉으로 혁신을 선도했다. 특히, 미술사의 혁명인 프랑스 인상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터너가 영국 최대 화가로 불리는 것이다.

007 제임스 본드가 바라보던 그 그림

J.M.W. 터너의 ‘비, 증기, 속도-대서부철도’(1844), 캔버스에 유채, 91x121.8㎝. 모두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 [구글아트프로젝트]

J.M.W. 터너의 ‘비, 증기, 속도-대서부철도’(1844), 캔버스에 유채, 91x121.8㎝. 모두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 [구글아트프로젝트]

터너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림은 무엇일까? 2005년 BBC 라디오 4의 서베이 등 여러 설문조사에 따르면 바로 ‘전함 테메레르’다. 졸저 『그림 속 경제학』(2014)에서 이 그림을 이렇게 묘사했다.

“지는 해의 광선이 장려한 트럼펫 소리처럼 대기 중으로 뻗어나가 구름과 강물 위에 찬란한 금빛 울림을 남겨놓았다. 이때, 유령 같이 창백하고 거대한 범선이 돛을 내린 채 그보다 작은 체구의 검은 증기선을 앞세우고 나타난다. (…) 범선과 증기선 중 어느 쪽이 전함 테메레르일까? 이 그림의 원제는 ‘해체를 위해 최후의 정박지로 이끌려가는 전함 테메레르’다. 저 장엄하지만 빛이 바랜 듯 희끄무레한 범선이 테메레르인 것이다. 증기선은 그것을 끌고 가는 예인선이고. 테메레르는 ‘영국의 이순신’ 넬슨이 나폴레옹 함대를 물리친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크게 활약한 전함이었다. 그러나 이 이름 높은 배도 세월이 흘러 낡을 대로 낡은 데다가 증기선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결국 1838년 해체의 운명을 맞게 됐다. 그 소식을 접한 터너는 템스 강에 나가 이 노장(老將)의 장례 행렬과도 같은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는 붓을 휘둘러 그 모습을 캔버스에 담은 것이 바로 그림 ‘전함 테메레르’다. (…) 터너는 당시 자신이 느꼈던 벅찬 감정을 저녁놀의 장려한 빛과 대기의 떨림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범선이 증기선을 앞세우고 드라마틱하게 등장하도록 장면을 재구성했다. 그렇게 해서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마치 하나의 알레고리 같은 작품, 즉, 저물어가는 옛 문명과 떠오르는 새로운 기계문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그림을 만들어냈다.”

‘전함 테메레르’는 시간의 흐름과 세대교체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영화에도 종종 등장했다. 대표적인 것이 제임스 본드 시리즈 중 특히 작품성이 높다는  ‘007 스카이폴’(2012)의 한 장면이다. 본드(대니얼 크레이그)는 은퇴를 결심했다가 그가 속한 첩보기관 MI6이 위기에 처하는 바람에 복귀한 후,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쇠퇴를 절감하며 내셔널갤러리에 우두커니 앉아 이 그림 ‘전함 테메레르’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이때 한 젊은 녀석(벤 위쇼)이 나타나 옆에 앉아서 이런 말을 하며 깐죽거린다.

영화 ‘007 스카이폴’(2012)의 한 장면. [사진 유튜브 캡처]

영화 ‘007 스카이폴’(2012)의 한 장면. [사진 유튜브 캡처]

“이 그림은 늘 내게 약간 비애감을 줘요. 장대한 낡은 군함이 수치스럽게도 해체를 위해 끌려가는 그림…. 피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죠, 안 그래요? 그쪽 분은 뭐가 보이세요?”

짜증난 본드가 “빌어먹게 커다란 배요. 이만 실례하죠”라고 대꾸하며 자리를 피하려 하자 청년은 폭탄 선언을 던진다. “007, 내가 요원의 새 쿼터마스터(무기·장비 담당)입니다.” 그 뒤 다음과 같은 날 선 대화가 오간다.

본드: 농담이죠?

Q: 왜요, 실험실 가운 안 입어서요?

본드: 왜냐하면 아직 여드름도 안 없어진 애니까.

Q: 이 일은 피부하곤 상관없는데요.

본드: 능숙함과는 상관있지.

Q: 나이 많다고 능률적이라는 보장은 없죠.

본드: 그리고 젊다고 혁신적이라는 보장도 없고.

신구세대의 충돌을 함축한 명화 앞에서 이보다 더 재치 있게 어울릴 대화가 또 있을까.

애덤 스미스 이어 20파운드에 자화상

영국 20파운드 지폐 신권(위)과 구권(아래). [사진 문소영]

영국 20파운드 지폐 신권(위)과 구권(아래). [사진 문소영]

‘전함 테메레르’는 터너의 자화상과 함께 영국의 새 20파운드 지폐에도 등장하는데, 영국 화폐가 미술가를 다룬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20년 2월 이 신권이 유통되기 시작했을 때, 당시 영국 중앙은행 총재였던 마크 카니는 “터너는 변화를 가져오는 예술을 했다”며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영국 미술가의 작품이 이제 20억 점의 또 다른 작품-새 20파운드 지폐-에 나타날 것이 기쁘다”고 말했다.

영국 중앙은행이 의도한 바인지 모르겠지만, 그 전에 20파운드 지폐에 있던 것이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1723-1790)의 초상화와 그가 『국부론』에서 논한 분업에 대한 그림이었다는 사실도 참 절묘하다. 스미스는 산업혁명과 새로운 경제시스템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경제학자였고, 터너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세상의 변화를 거의 최초로 그림에 담은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을 이끈 동력 중 하나는 ‘전함 테메레르’에 등장하는 증기선에 사용된 증기기관의 발명이었다. 증기기관으로 대규모 기계를 돌릴 수 있게 됐을 뿐만 아니라, 증기선과 증기기관차가 나타나 운송과 속도의 혁신이 일어났던 것이다.

대부분의 당대 미술가들은 이런 격변을 그림에 담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주로 그리스신화의 신과 영웅과 아르카디아(전원적 낙원)를 그렸으며 흉측한 증기선 따위를 그리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당대 사람들은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는데, 범선 테메레르가 나타내는 위대한 옛 것에 대한 향수와 증기선이 상징하는 새로운 기계문명에 대한 거부감을 담은 그림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터너는 정말 산업혁명으로 인한 변화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을까? 그의 또 다른 유명한 그림 ‘비, 증기, 속도-대서부철도’(사진3)을 보면 그렇게 볼 수 없다.

이 그림은 터너가 기차를 타본 다음 그 인상을 바깥에서 본 시점으로 재구성해서 그린 것이다. 당시 이미 일흔 살에 가까웠던 터너는 어느 비 오는 날 기차를 타고 가면서, 차창 밖 풍경이 열차의 빠른 속도 때문에 쭉쭉 늘어나고 빗줄기 속에 어그러지며 빛과 뒤섞이는 것을 보았다. 또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바람으로 그 속도를 느꼈다. 현대의 우리에게는 일상적인 감각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터너는 그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젊은이들 못지 않게 온몸으로 받아들여 혁신적인 그림으로 그려냈던 것이다.

‘비, 증기, 속도-대서부철도’의 과장된 원근법은 그림의 주인공인 증기기관차가 더욱 극적으로 속도감 있게 모습을 드러내게 해준다. 빗줄기와 안개를 뚫고 나타나는 기차의 불빛을 보고 있으면 증기기관의 굉음까지 귀에 들릴 듯 박진감이 넘친다. 고전주의 풍경화들과 달리 거친 붓질로 묘사된 빛과 대기의 떨림이 역동성과 속도감을 더해준다.

터너는 이 그림을 비롯해 후기 그림으로 갈수록 훨씬 빠르고 거친 붓질로 그렸는데, 그의 전기 영화 ‘미스터 터너’(2014)에 나오듯이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그 유명한 화가 터너 선생님이 이제 노망이 들었다”고 수군거렸다. 이미 성공한 화가였는데도, 이렇게 비난까지 감수하며 격변하는 세상을 파격적인 화법으로 표현하는 혁신을 감행한 덕분에, 터너는 훗날 프랑스 화가들의 인상주의 혁명에 영감을 주었고, 영국의 최대 화가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지금 영국에서 활동하는 가장 혁신적인 미술가에게 주는 상의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딴 ‘터너 프라이즈’다.

이쯤에서 다시 그림 ‘전함 테메레르’를 보자. 마치 코로나 팬데믹으로 한 시대의 종말과 알 수 없는 새 시대의 시작 사이에 서있는 우리 현재를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시대의 변화에 예리하게 반응하고 새로운 창조를 이끌어낸 터너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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