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가 새역사 썼다…주총장 배달된 박스 3개에 SM 첫 배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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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오전 9시 서울 성수동 아크로 서울포레스트디타워 SM엔터테인먼트 그룹 본사 대회의실에 큰 박스 3개가 도착했다. 상자 안에는 이날 열리는 주주총회를 위한 위임장 1000여장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의결권을 가진 주식(약 2316만4000주) 중 60%가 넘는 약 1400만주가 위임장으로 이날 주총에 참석했다.

이날 주총은 2시간가량 늦게 시작됐다. 출석 주식 수 파악을 위한 위임장 확인에 시간이 소요된 탓이다. 70~80명의 주주는 주총장에 직접 참석했다. 소액주주의 이런 높은 관심과 지지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SM 창사 이래 첫 배당을 하기로 한 데다 주주 측이 제안한 후보가 감사로 선임됐다.

소액주주들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면서 '거수기에 그쳤던 주총의 모습이 달라지고 있다. 주주 측 감사를 선임하거나 배당과 자사주 소각 등을 결정하는 회사들이 속속 등장했다. 주주 입장에서는 '우리 회사가 달라졌어요'다.

에스엠 창사 이후 첫 배당, 주주 측 감사 선임 

[사진 SM엔터테인먼트]

[사진 SM엔터테인먼트]

이날 열린 SM 주총에는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다. SM과 주주제안에 나선 행동주의 펀드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이하 얼라인)의 표 대결이 예상되면서다. 주총 전 소액주주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 SM은 소속 가수의 사인을 보내기도 했다.

얼라인 측은 SM이 뛰어난 사업 성과에도 거버넌스(지배구조)에 대한 아쉬움으로 저평가되고 있는 만큼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 외부 주주가 추천한 독립적인 감사 선임이 필요하다는 주주제안에 나섰다. 특히 최대주주인 이수만 프로듀서의 개인회사인 라이크기획과의 프로듀싱 용역 계약이 부당한 일거리 몰아주기라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날 주총에서 소액주주들이 화력을 몰아주며 얼라인 측이 제안한 곽준호 KCF테크놀로지 전 최고재무책임자(CFO)를 감사로 선임했다. 창사 이후 첫 배당도 실시하기로 했다. 주주제안이 통과되자 이날 에스엠은 전날보다 2.51% 오른 8만1600원에 장을 마쳤다. 이날 장 중 한때 7% 대가량 오르며 사상 최고가(8만5600원)를 경신하기도 했다.

SM을 향한 주주행동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3년 전 KB자산운용도 같은 문제를 지적하며 주주 행동에나섰지만 당시에는 실패로 끝났다. 이창환 얼라인 대표는 "사회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며 “동학개미운동 이후 소액 개인 주주들은 더 이상 기업의 불합리한 행동에 가만히 있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수로 안건을 처리하고 20~30분 만에 끝났던 ‘거수기’ 주총과는 다른 모습이다. 주식 소유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주총에서 '개인주주의 힘'도 커지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의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주식을 소유한 개인은 1374만명으로 2020년 910만명에서 464만명(51%)이나 증가했다.

소액주주를 모을 수 있었던 '비밀병기'도 있었다. 전자 서명으로 서면 위임을 받을 수 있는 앱(비사이드)을 이번 주총에 사용해 소액주주 수백명의 위임장을 모을 수 있었다. 현행법상 기업이 전자투표를 도입하지 않으면 소액주주의 표를 모으려면 모두 오프라인 주총에 참석하거나, 일일이 서면위임을 받아야 했지만 해당 앱을 통해 이런 문제를 푼 것이다.

3%룰, 스튜어드십 코드도 영향 

행동주의 펀드가 주총에서 나름의 성과를 낸 데는 제도 변화도 영향을 미쳤다. 2021년부터 '3%룰'이 도입됐다. 주총에서 감사 또는 감사위원을 선출할 때 대주주 의결권이 3%로 제한된다. 소액주주들도 표대결이 해볼만 한 싸움이 된 것이다.

올해 주주충회 주요 행동주의 펀드 성과.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올해 주주충회 주요 행동주의 펀드 성과.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ESG 열풍 속 기관들이 앞다퉈 도입한 스튜어드십 코드도 게임체인저였다. 스튜어드십 코드란 기업이 잘 운영되는지 소통·감시하는 기관투자자들의 행동지침을 말한다. 실제로 SM과 얼라인의 표 대결에서도 100개의 기관 중 90%의 기관이 얼라인 측 손을 들어줬다. 이 대표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으로 기관이 펀드 수익자 입장에서 의결권을 행사하게 됐다”고 평했다.

실제로 이번 주총 시즌에는 얼라인 외에도 많은 행동주의 펀드들이 성과를 거뒀다. 차파트너스자산운용은 올해 주총 시즌에 사조오양과 토비스, 상상인 총 세 곳에 주주행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사조오양은 주주 측 감사를 선임했고, 토비스는 보유한 자사주 소각을 결정했으며, 상상인은 첫 분기배당을 결정했다.

안다자산운용의 목표가 된 SK케미칼은 약 587억원의 배당액을 확정했으며, 약 500억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과 소각계획을 발표했다. 주총 표 대결까지 가지 않더라도 펀드의 주주행동에 부담을 느낀 해당 기업이 먼저 적극적인 주주환원 정책을 내놓기도 했다. VIP자산운용이 주주서한을 발송한 아세아와 아세아시멘트는 주총 소집 결의에 앞서 주주친화정책을 공시했다.

주총에서 “최저임금만 받겠습니다”  

소액주주를 달래기 위해 주총에서 ‘파격 공약’을 내건 곳도 이어졌다. 신원근 카카오페이 대표는 지난 28일 주주총회에서 주가가 20만원에 도달할 때까지 최저임금만 받겠다며 책임경영을 약속했다. 기우성 셀트리온 대표는 지난 25일 정기 주총에서 주주들이 제안한 최저임금을 수용했다.

지식과 정보로 무장한 소액주주들의 날카로운 공세에 기업도 긴장하고 있다. 지난 16일 열린 삼성전자 주총에선 갤럭시 S22의 ‘게임 옵티마이징 서비스’(GOS) 강제 적용 논란에 대해 주주가 “사과할 생각이 있냐”고 묻자 한종희 대표이사(부회장)가 “주주와 고객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송구하다”며 단상에 나와 주주들에게 허리를 숙였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개인투자자들이 주주환원이나 의결권에 대해 아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유튜브 등을 통해 각종 정보를 접하며 인지하고 또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모습"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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