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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게 어질러진 아들 방에서 '카오스'와 '코스모스'를 보다 [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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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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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
김헌 지음
을유문화사

읍참마속(泣斬馬謖), 당랑거철(螳螂拒轍) 같은 고사성어가 서양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서구 문화에서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이야기의 보물창고다.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면 실감하게 된다. 네 글자에 방대한 이야기를 압축한 고사성어처럼 그리스 로마 신화는 세상 만물에 꾹꾹 사연을 새겨넣었다.

공작 날개에 달린 눈동자 무늬는 여신 헤라를 돕다 죽음을 맞이한 눈이 100개 달린 괴물 아르고스와 연결된다. 제우스의 머리를 쪼개고 나온 여전사 아테나는 올리브를 키운 풍요의 여신이기도 하다. 아폴론과 아르티메스는 우리나라 전래 동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와 판박이다. 한 떨기 꽃에도, 쉬파리가 끈질기게 소의 주변을 맴도는 데에도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와 질투와 분노가 스며들어 있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인 글쓴이 김헌은 철학자다. 그는 “신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뜻에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로 집필 동기를 설명했다. 인간의 근원적 호기심을 채워준다는 점에서 철학과 신화는 동의어다.

21세기 한국 철학자의 눈으로 서양 신화 읽기

그는 문화의 원형질인 신화를 현미경이자 돋보기로 삼아 우리의 일상을 들여다본다. 심하게 어질러진 아들의 방을 통해 카오스와 코스모스를 설명하고, 제우스가 권좌에 오르는 모습을 현실 정치의 협치와 분권에 빗댄다. 21세기를 사는 한국 철학자의 시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해석한 게 반갑다. 또 신화와 연결된 고대 문헌을 원문과 함께 소개하는 등 희랍어와 라틴어에 정통한 저자가 원전을 직접 연구한 내공이 책 곳곳에 묻어있다.

1부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21편, 2부 ‘신들의 영광’ 27편, 3부 ‘영웅의 투쟁’ 24편, 4부 불멸과 필멸 23편 등 책은 모두 90편의 글로 돼 있다. 한꺼번에 읽는 것보다는 하루에 한 편씩 서너 달에 걸쳐 야금야금 읽어나가도 좋겠다. 읽다 보면 마블 영화와 소설 ‘해리 포터’ 시리즈가 모두 그리스 로마 신화의 변주곡임을 거듭 느끼게 된다. 이 책 90편 속엔 900편 이상의 영화 스토리가 담겨 있다.

아파트나 자동차의 브랜드의 이름을 짓는 사람에겐 뜻밖에 실용서가 될 수도 있겠다. 밤의 여신 뉙스, 기만의 여신 아파테, 노고의 신 포노스, 싸움의 신 마코스, 전투의 신 휘스미네 등등. 신들의 이름은 뭔가 있어 보인다. 게다가 의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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