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님, 저도 공주입니다.”
2016년 가을 서울 강남의 한 식당에서 윤석열 대전 고검 검사는 정진석 새누리당(국민의힘의 전신) 의원에게 이렇게 인사했다. 당시 두 사람은 지인들이 만든 모임에 나갔다가 우연히 처음 만났다. 윤 검사는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박근혜 정부와 각을 세우고 난 뒤여서 제법 인지도가 있는 인사였다. 공주 태생으로, 공주ㆍ부여ㆍ청양이 지역구였던 정 의원(현 국회 부의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윤 검사님이 왜 공주십니까. 서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윤 검사는 “아버님(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이 공주 농고 졸업생입니다. 그러니 저도 공주죠”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마침 1960년생 동갑인 두 사람은 “그럼 고향 친구로 지냅시다”라며 의기투합했다. 이들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했다.
‘尹 대망론’ 띄운 정진석…“조국이 옳다면 1번, 尹 옳다면 2번”
한 차례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정진석 부의장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잠재력을 감지했다. 국민의힘 의원 중 가장 먼저 윤 당선인을 띄운 게 정 부의장이다. 그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2019년 조국 사태가 결정적 계기였다”며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었음에도 권력에 맞선 결연한 태도를 보고 윤 당선인에게 반했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기자 출신으로 각종 매체에 자주 등장했던 정 부의장은 기회가 될 때마다 윤 당선인을 홍보했다. 2020년 21대 총선을 앞두곤 공주에 ‘공주 출신 윤석열 손발 자른 검찰 대학살, 국민은 분노한다’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윤석열 대망론’이란 말은 이때부터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윤 당선인에 대한 기대감이 확산하자 더불어민주당도 긴장했다. 민주당은 정 부의장이 쓴 ‘공주 출신 윤석열’이란 표현이 허위사실이라며 선관위에 고발했다. 선관위는 정 부의장에게 전화를 걸어 “윤 총장이 왜 공주 출신이냐”고 따져 물었다. 정 부의장은 “윤 총장 본인이 그렇게 말했다. 직접 물어보라”라고 답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론 해프닝으로 끝났다.
총선 유세에서도 정 부의장은 “조국이 옳다면 1번을, 윤석열이 옳다면 2번을 찍어 달라”며 “고향 친구 윤석열을 지키겠다”고 외쳤다. 당시 총선 경쟁상대인 기호 1번 민주당 후보는 문재인 정부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박수현 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었고, 결과는 기호 2번 정 부의장의 승리였다.
출마 고민 尹과 소주 회동…尹 출마에 의원 24명 대동
윤 당선인은 지난해 5월 정 부의장에게 직접 연락을 했다. 당시 검찰총장에서 사퇴하고 진로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5월 26일 두 사람은 서울 강남의 한 한정식집에서 소주병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2016년 만남 이후 처음으로 다시 만난 날이었다. 윤 당선인은 전날 윤희숙 의원을 만난 데 이어, 현역 의원 중 두 번째로 정 부의장을 찾았다.
이 자리에서 정 부의장은 윤 당선인에게 “지금 국민은 당신이 정치하기를 바란다”며 “국민의힘에 입당하라”고 권유했다. 현실 정치에 대한 여러 대화를 나눈 뒤 윤 당선인은 사흘 후 외가인 강원 강릉으로 가 권성동 의원을 만났다. 정 부의장은 “나를 찾은 데 이어 권 의원도 만난 것을 보고 정치에 뜻이 있다고 느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후부터 정 부의장은 물심양면으로 윤 당선인을 도왔다. 윤 당선인의 6월 29일 공식 출마 선언이 있기까지, 정 부의장은 윤 당선인의 핵심측근으로 알려진 권성동ㆍ장제원ㆍ윤한홍 의원과 수시로 머리를 맞댔다. 여의도 정치 경험이 전무한 윤 당선인이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출마 선언을 할 때 국민의힘 의원 24명이 찾아온 것도 그의 공로다. 이날 정 부의장은 권성동 의원과 함께 윤 당선인 양옆에 서 ‘좌진석ㆍ우성동’이란 별칭이 붙기도 했다.
정 부의장은 “출마 회견을 앞두고 이틀 동안 의원 30여명한테 전화를 돌렸다”며 “누가 요청한 것도 없고, 자발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정 부의장이 전화를 돌리던 과정에선 이준석 당 대표가 정 부의장에게 항의하는 일도 생겼다. ‘당내 주자 자강론’을 펴던 이 대표는 정 부의장의 의원실을 직접 찾아와 “의원님, 나서지 말아달라”며 “출마 회견에 나간 사람은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정 부의장은 “의원 개인이 판단할 문제지, 대표가 관여할 사항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尹에게 “내 직함 빼달라”…기자에겐 “‘윤백관’으로 써달라”
윤 당선인의 출마 선언과 국민의힘 입당을 끌어낸 이후 정 부의장은 철저히 뒤로 물러섰다. 당장 경선 캠프 공동선대위원장으로 내정됐으나, 정 부의장은 윤 당선인에게 직접 “제 이름은 빼달라”며 “바깥에서 자유롭게 돕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 부의장은 충남총괄선대위원장 외에는 어떤 직함도 맡지 않았다. 하지만 물밑에선 민주당 출신 이용호 의원을 국민의힘에 영입하는 가교 역할을 하는 등 주요 변곡점마다 주요 역할을 했다.
현재 정 부의장은 당내 최다선(5선)이다. 초선 비율이 53%(110명 중 59명)인 국민의힘에서 정 부의장은 당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아 6월 지방선거를 준비하고 있다. 정 부의장은 “내 개인의 부귀영화엔 아무런 관심이 없다”며 “윤석열 정부가 성공하는 게 가장 중요하고, 그렇게 될 거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윤백관’(윤석열을 위해 백의종군하는 관계자)이라 써달라고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