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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항녕의 조선, 문명으로 읽다

“굳이 귀한 소 잡아 귀신에게 제사 지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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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유교국가와 미신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천지(天地)신명께서는 감동하시어 한양성 이몽룡을 청운(靑雲)에 높이 올려 내 딸 춘향 살려지이다!”

춘향이 어미 월매가 개울물에 머리 정갈하게 감아 빗고, 정화수(井華水·정안수) 한 동이 바쳐놓고 빌고 있다. 사또 변학도의 수청을 들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옥에 갇혀 있는 춘향을 위한 기도였다. 청운은 과거 급제를 말한다. 어려서 본 ‘춘향전’에서 이몽룡은 이런 월매의 모습을 담 밖에서 보고서 “내가 조상의 덕으로 급제한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장모의 덕이었구나”라고 말했다.

정말 이몽룡이 월매의 사위가 됐는지, 사또의 수청을 안 든다고 옥에 넣을 수 있는지, 급제한다고 옥에 갇힌 사람을 빼줄 방도가 생기는지 이러한 의문은 미루어 두자. 월매처럼 도움을 청할 곳이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일이라는 점은 수긍되지 않는가. 첫새벽에 우물에서 떠온 정화수를 뒤란 장독대에 올려놓고 비는 어머니는 무력한 한계를 넘어 보편적 공감의 이미지로 다가오지 않는가.

국정 중심지 도성에 무당 금지령
점 치거나 사주 보는 정도에 그쳐

합리·과학 중시한 유교 주지주의
무당에 과세, 전염병 치료도 경계

‘굿=미신=음사’는 사회 어지럽혀
토론·제도 통한 국정운영에 무게

이몽룡의 장원급제 기원한 월매

조선 후기 화가 신윤복의 풍속화첩에 포함된 굿 장면. 상차림이 소박한 편이다. [사진 문화재청]

조선 후기 화가 신윤복의 풍속화첩에 포함된 굿 장면. 상차림이 소박한 편이다. [사진 문화재청]

사람에게는 사회관계 때문이든 자연조건 때문이든 빌고 싶은 때가 생긴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고, 희노애락(喜怒哀樂)도 그 안의 일이다. 종교나 신앙이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됐으며, 고등종교와 하등종교의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그래서 가능하다.

보통 사람들은 아플 때 특히 무기력해진다. 아픈 이유야 얼마나 많은가. 허준(許浚) 등이 편찬한 『동의보감(東醫寶鑑)』에 나오는 ‘내경편(內景篇)’ ‘외형편(外形篇)’ ‘잡병편(雜病篇)’ 항목만 얼추 넘겨보아도 수천 종이 넘는다. 현대 의학은 1만여 종의 병이 있으며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병은 500종에 불과하다고도 말한다.

수천 년 전부터 의학이 발달했지만 인류가 아픈 이유를 알고 대처의 폭을 넓힌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하겠다. 발병(發病)의 주요 원인인 미생물을 관찰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0~300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침 뱉기가 공중보건상 금기로 된 때는 침 속에 병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18세기 이후부터다. 그 전에는 침 뱉기를 무례한 행동이라는 이유로 금기로 삼았을 뿐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든 전염병은 홍역(紅疫)과 두창(痘瘡·천연두)이었다. 두창이 우두(牛痘) 주사를 통해 현재 거의 사라졌지만, 두창이 창궐할 때는 어른의 치사율이 30%를 넘었다니 아이들에게는 더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두창에 걸리면 시력을 잃기도 했고, 치료하더라도 곰보가 돼 환자에게 고통의 흔적을 남겼다. 홍역은 전염성이 강해 한 아이라도 걸리면 온 동네 아이들이 줄줄이 감염됐다.

홍역이나 두창은 모두 소의 사육과 관련이 있었다. 15세기 조선에는 약 3만여 마리가 있었고, 20세기 초에는 110만여 마리까지 불어났다. 어린 시절 사랑방에 여물 쑤는 솥이 있었고, 외양간은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마 조선시대 민가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다. 여물 냄새가 집안에 퍼지면 저녁 먹을 시간이었는데, 사람보다 소에게 여물을 먼저 갖다 주었다. 이렇게 소는 거의 가족이었기에 더욱 홍역과 두창은 가까이 있었던 셈이다. 아이가 홍역이나 두창에 걸려 위독해지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했다.

굿에 대한 수요와 비판 공존

대한제국 시기의 굿판. 조선시대 무당들은 한양 도성 출입이 금지됐다. [중앙포토]

대한제국 시기의 굿판. 조선시대 무당들은 한양 도성 출입이 금지됐다. [중앙포토]

홍역이나 두창이 소와 관련이 있어서였는지 굿을 하면서 소를 잡기도 했던 모양이다. 세종 때 함경도에 나갔던 신인손(辛引孫)은 “미신으로 무당을 숭상하여 굳이 소를 잡아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말했다. 함경도 지역은 소가 더 귀했을 텐데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니, 전국에 걸쳐 굿을 하며 소를 도살하는 일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하지만 농업에서 소가 차지하는 중요성 때문에 이런 행위는 점차 줄었다.

굿을 주재하는 무당은 도성=한양에서 쫓아냈다. 이 조치는 조선 초기인 세종·성종 때뿐 아니라 숙종·정조·순조 때에도 나타난다. 이는 굿에 대한 수요가 지속됐을 뿐 아니라, 동시에 경제와 문화 중심에서 굿을 멀리하는 인식과 정책 또한 계속됐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도성은 조정이 있는 곳이었다. 국정을 논하는 조정 가까이 무당을 둘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사대부들도 『주역』을 통해 점을 치기도 했고, 혼인 때 사주(四柱)를 교환하는 일도 빈번했으며, 국가 행사에 택일하는 음양과(陰陽科) 관원도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서울 원서동에 있는 조선시대 관상감(觀象監) 터. 천문·기상·풍수 등을 관장한 곳이다. [중앙포토]

서울 원서동에 있는 조선시대 관상감(觀象監) 터. 천문·기상·풍수 등을 관장한 곳이다. [중앙포토]

숙종 때 이건명(李健命)은 도성에서 무당을 쫓아낼 때 “수백 명이 살 곳을 잃게 될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언뜻 무당 옹호로 보일 수 있는데도 이런 말을 한 것은 그만큼 무속의 통제에 여유가 생겼다는 의미일 것이다. 무세(巫稅)·신포(神布)라고 하여 세금을 걷은 것은 또 다른 통제의 징표였다.

사람들은 굿을 음사(淫祀)라고 불렀다. 지나친 제사, 즉 ‘제사 지낼 대상이 아닌데 제사 지내는 행위’라는 말이다. ‘제사 지낼 대상’이 무엇인지는 간단하지 않지만, 조선 사람들은 미신을 음사라고 불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귀신을 부르는 공창(空唱),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신탁(神託), 부적과 주문, 쌀로 점을 치는 미복(米卜), 무당이 점을 치는 무복(巫卜), 작두를 타는 도인무(蹈刃舞), 죽은 사람을 부르는 접살(接煞), 신내림인 강신(降神)이 음사를 이루는 요소다. 일찍부터 나라에서는 ‘음사를 금하는 세부조항[淫祀節目]’까지 만들었고, 『경국대전』에도 음사 금지 규정이 실렸다.

‘미신=음사’의 정확한 의미를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음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통으로 “역병이 돌면 아이들이 죽고 사는 것은 자기에게 달렸다고 요사한 말을 하고, 굿을 해서 집안이 파산하게 하며” “풍속이 무너지고 어지러워지며, 재산을 축낸다”고 비판했다. 여기서 음사를 규정하는 두 가지 기준을 확인할 수는 있다.

음사 금지하는 세부조항도 작성

조선 후기 문신 오명항의 초상(일부). 천연두를 앓은 흔적이 역력하다. [중앙포토]

조선 후기 문신 오명항의 초상(일부). 천연두를 앓은 흔적이 역력하다. [중앙포토]

첫째, 재산을 축내 집안을 파산하게 한다는 점이다. 굿을 하는 데는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이는 가족생활의 유지와 재생산을 위협함으로써 사회의 기본 단위를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지적이다. 둘째, 굿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 상황, 예컨대 역병 같은 사안을 굿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궁지에 빠진 사람들을 현혹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거짓·사기로 사회적 신뢰가 깨지는 것을 풍속이 어지러워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은 좋지 않은 마음을 먹을 수도 있는데, 이때 무속이 종종 타인을 해치는 저주로 작용하기도 했다. 방자(方子)·무고(巫蠱)가 그것이다. 중종 때 쥐를 볶아 동궁전에 묻어 세자를 저주했다고 해서 벌어진 작서(灼鼠)의 변이나 광해군대 계축옥사의 저주 혐의 등, 주요 범죄 사건을 기록한 추안(推案)에서 많은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굿=음사를 멀리한 데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생로병사의 초월적 주제에 거리를 두고 가능한 합리적 과학적 지식을 중심으로 판단하려는 유가(儒家)의 주지주의가 있다. 또한 가족을 기초로 한 사회 집단의 재생산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려는 현실주의의 영향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의술이나 사회시스템으로 대처할 사안을 굿으로 대신하는 경향은 금지하거나 통제해야 한다고 본 듯하다. 특히 국정은 논의와 설득, 제도와 규칙에 따라 운영돼야 하기에, 복이든 저주든 음사=굿=미신은 멀리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역사 연구, 정치·경제에서 생태·환경으로…

인간은 시공간적으로 유한하며, 모르는 게 많을 뿐 아니라, 어쩌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역사학자는 더하다. 사라진 게 더 많은 과거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사람은 사는 게 숙명이듯, 역사학자는 과거를 이해해야 한다.

최근 역사학도 사이에 관심을 끄는 분야가 있다. 생태사·환경사·기후사 등으로 표현되는 생태환경사다. 인간 중심의 역사에서, 인간과 자연, 우주의 연관을 포착하는 역사 연구로 가자는 취지다. 이는 정치사·경제사·사회사 중심의 근대 역사학에 대한 반성을 포함하며, 지구온난화 등 인류 생존에 대한 높아진 문제 의식을 반영한다.

질병이나 농사에 영향을 미치는 기후 등 생태환경은 굿과 음사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나아가 자연의 한 구성원인 인간에게 질병·날씨·기후가 맺는 상호작용을 나 몰라라 하면 역사학도 미신에 빠질지 모른다. 무지(無知)나 미지(未知)를 탐구하지 않고 확정하는 지점에서 인간은 굿을 찾고 미신에 빠지듯, 역사 공부에 그런 미혹이 없을까. 세계에 대한 지식과 이해만이 그 미혹을 줄여줄 것이다.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