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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당선인이 받은 선물, 때론 ‘먹튀’도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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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선물이란 무엇인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관계를 시작하고 싶은가? 선물을 하라.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가? 또 선물을 하라. 관계를 시원하게 말아먹고 싶은가? 부적절한 선물을 하라. 관계를 끝내고 싶은가? 이별 선물을 하라. 선물은 그야말로 관계의 시작과 끝이다.

관계를 시작하고 싶은데, 왜 선물을 해야 하냐고? 그럼 폭력을 행사하겠나? 한 대 때리고서 말하는 거다. “잘 지내보자는 뜻에서 한 대 때려봤어.” 미친놈이 아닐까. 그러나 세상에는 괴롭히는 것으로 상대의 관심을 얻으려는 이들이 있다. 이런 이들이 원하는 관계는 왜곡된 관계이다. 멀쩡한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이라면, 미소 한번, 물 한 잔이라도 좋으니 선물을 주면서 접근한다.

선물은 갚아야 할 의무 속성 있어
그 의무 초월하는 게 고도의 정치

좋은 정치는 노획물 배분과 달라
공약 어겨야 공익에 도움될 수도

선거 도운 사람 꼭 중용해야 할까
‘먹튀’ 정당화할 보편적 대의 필요

괴롭힘이나 폭력은 대개 그 자체로 나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은 너무 자기중심적이다. 상대의 고통에 충분히 공감했다면, 때리지 않았을 것이다. 폭력은 상대를 제거하고자 할 때 쓰는 방법이지, 관계를 시작할 때 쓰는 방법이 아니다. 자기중심적이기만 하면, 관계의 핵심인 상호성이 생겨나지 않는다.

자기가 삼겹살을 좋아한다고, 채식주의자에게 삼겹살을 선물하지 말라. 자기가 고양이를 귀여워한다고, 쥐에게 고양이를 선물하지 마라. 그 선물에는 상대를 위하겠다는 마음, 상대의 입장에 서보겠다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 그래서는 관계가 시작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선물은 자신의 협소한 우주를 한 발자국이라도 넘어설 때 비로소 가능하다. 모름지기 선물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주는 게 아니라, 상대가 좋아할 만한 것을 주는 것이다. 물론 둘 다 좋아하면 제일 좋겠지만.

『논어』에 나오는 공자와 양화 사례

생각의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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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좋아하면서도 본인이 선뜻 사기에는 좀 부담스럽거나 각별한 물건을 선물하는 것이 좋다. 누구에게나 일상적으로 필요한 생필품은 선물로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 결혼 10주년을 기념한답시고, 부인에게 평소에 먹는 쌀이나 밀가루를 선물하지 말라. 결혼 20주년을 기념한답시고, 남편에게 치실이나 치약 같은 거 선물하지 말라. 설탕·맛소금 같은 거 선물하지 말라. 어차피 그냥 집에서 쓸 물건 사면서 선물이라고 우기는 것 같다. 선물에 어울리는 낭만을 자아내기 어렵다.

상대를 배려하는 선물은 상대의 리액션을 끌어내기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은 관심 있는 상대에게 선물을 보낸다. 그것이 관계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논어』에 보면 양화라는 인물이 공자에게 관심을 가진다. 급기야 공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데, 공자는 양화를 좀처럼 만나주지 않는다. (陽貨欲見孔子, 孔子不見) 그러자 양화는 공자에게 삶은 돼지를 선물로 보낸다. 공자가 고기를 좋아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라, 이 정도면 상대를 배려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쯤 되면, 공자도 그냥 깔고 뭉개기 어렵다.

선물은 잘 주기도 어렵지만 잘 받기도 어렵다. 적절한 선물은 그에 합당한 리액션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마르셀 모스(Marcel Mauss)가 말한 대로, 선물에는 의무의 속성이 있다. 선물을 주면 받아야 할 의무가 생기고, 선물을 받으면 갚아야 할 의무가 생긴다. 선물을 받고서 깔고 뭉개고 있으면, 받은 이가 무례한 사람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공자는 양화를 상대하기 싫지만, 나름 적절한 선물이 온 것을 어쩌랴. 고민 끝에 공자는 양화가 없는 틈을 타서 인사를 하러 간다. (孔子時其亡也, 而往拜之)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하는 것은 선물의 속성이 아니다. 주고받아야 선물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선물하기가 있나. 그런 것은 없지 않을까. 다들 감사 인사 정도는 바랄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인사를 하러 간 것이다. 나는 귀여우니까 늘 선물을 받기만 해야지, 이런 미친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예외는 있다. 비현실적으로 귀여운 사람들이 드물게 존재한다. 그 정도로 저세상 귀여움이라면, 그들의 귀여움 자체가 인류를 위한 선물이다. 그쯤 되면 일방적으로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늙고 귀여움도 결국 퇴색한다. 매일 마스크팩, 아니 전신팩을 해도 오는 노화를 막을 수 없다. 이제 그들도 일방적으로 선물을 받기를 그치고, 받은 선물을 갚을 때가 온 것이다.

강희제가 숙종 선물 물린 까닭

선물을 갚는 것도 기술이 필요하다. 받은 것과 똑같은 물건을 선물하면 되지 않느냐고? 선물은 등가 교환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2만원 짜리 손수건을 받았다고 똑같은 가격의 손수건을 선물하는 것은 자칫 상대를 모욕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선물을 갚는 것이 아니라, 빚을 갚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각자 처지가 다르니, 처지와 상황에 맞게 선물을 갚으면 될 것이다. 경우에 따라, 정성 어린 손편지 한 통이 값비싼 선물 이상이 될 수 있다.

선물 갚는 시기도 중요하다. 마치 선물 받은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오랫동안 꾸물거리는 것은 좋지 않다. 받으면 받았다고 인사를 하거나 답례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선물을 받은 즉시 선물을 되갚아도 이상하다. 너무 신속한 되갚음은 상대에게 모욕을 줄 수 있다. 상대가 비싼 밥을 샀다고 해서, 바로 이어서 이번에는 자기가 살 테니 한 끼 더 먹고 헤어지자고 해보라.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다고 생각할 것이다.

선물은 정치에서도 중요하다. 정치는 혼자서 할 수 없다. 네트워크를 넓혀서 자신의 운신 폭을 확장해야 한다. 선물을 주고받는 일은 곧 네트워크를 유지, 확장하는 일이다. 분명한 권력관계 안에서 선물을 주고받는 일은 매우 민감한 정치적 판단을 요한다. 선물을 주고받는 일도 예식의 일부이고, 예식의 중요한 기능은 권력관계를 확인하는 데 있다. 세배를 하는 이가 아랫사람이고 세뱃돈을 주는 사람이 윗사람이다. 조공국은 토산품을 바치고, 종주국은 우월한 문명을 과시하는 넉넉한 예물로서 화답한다.

아랫사람이 선물을 바치는데 윗사람이 받지 않으면, 아랫사람은 전전긍긍한다. 혹시 네트워크에서 축출되는 조짐은 아닐까. 1678년 숙종이 청나라 강희제에 보낸 외교문서에 예의상 쓰지 말아야 할 자구(字句)가 포함되었다. 강희제의 신하들은 숙종에게 오천냥의 벌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펄펄 뛰었다. 강희제는 너그러이 용서해주자고 제안한다. 그 제안에 접한 숙종은 감사 표시로 선물을 바친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은 그 선물을 받지 않는다. 학술 연구에 따르면, 이 선물을 받지 않은 것 자체가 징벌의 의미를 띠었다.

이것이 어디 단지 옛날 일이랴. 21세기 한국, 누군가 대학 총장 선거, 혹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돕겠다고 사람들이 모여든다. 유력 후보일수록 많은 사람이 꼬인다. 자기가 치약이나 치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자기 재능을 그 후보에게 ‘기부’하려 든다. 혼자 힘으로 당선될 수는 없기에 후보는 그 선물을 받는다. 그 선물은 공짜가 아니다. 선물에는 의무의 속성이 있기에, 후보는 아무나 자신의 캠프에 들이지 않는다. 캠프에서 돕는 이들 모두가 오로지 충심에서 일하는 것일까?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는 이렇게 말했다. 상당수는 “순전히 관직 사냥꾼을 위한 조직”이다.

“선출직이 하는 인사는 보은성”

마침내 그 후보가 당선됐다고 해보자. 이제 그는 선물을 되갚아야 한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캠프에서 일했던 이들 중 상당수는 자신들의 봉사가 보답 받기를 원한다. 이른바 보은 인사를 기대하며, 초조하게 전화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참여정부 초대 정무수석 비서관을 지낸 유인태씨는 라디오 프로그램 ‘김현정의 뉴스쇼’에 나와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선출직으로 뽑힌 사람이 하는 인사는 거의 다 보은성이다.”

이것이 한국 정치 특유의 현상일까. 그럴 리가. 막스 베버는 『소명으로서 정치』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공한 당파의 우두머리는 추종자들에게 보상으로 봉토·토지·봉직, 그리고 화폐 경제가 발전 이후에는 봉록을 주었다. 오늘날 정당 지도자들은 충성 봉사의 보상으로 정당, 신문사, 협동조합, 건강보험공단, 지방자치단체, 국가기관 등에 있는 여러 보직을 나누어준다. 정당 간 투쟁은 본질적인 대의를 위한 투쟁인 동시에 보직 수여권을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그러나 좋은 정치는 노획물 배분과는 다르다. 당선되고 나면 정치가 단순한 교환경제 이상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유세 과정에서 받은 선물을 똑같이 갚을 필요는 없다. 공약을 어기거나 선물을 “먹고 떨어져야” 비로소 공익에 부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과감하게 선물을 먹고 떨어져야 한다. 캠프에서 일했다고 중책을 줄 필요도 없고, 설익은 것으로 판명된 공약을 굳이 지켜야 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공약을 어기거나 선물을 먹고 떨어지라는 말은 아니다. “먹튀”를 정당화할 수 있는 보편적 대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한 대의가 있다면, 시민들은 공약을 어겨도 납득할 것이고, 후보를 도왔던 이들도 불만스러운 인사(人事)를 용인할 것이다. 그렇게 등가교환으로서의 정치를 찢고 나올 때, 정치인에게는 어떤 긍정적 카리스마가 생기고, 그것이야말로 시민에 대한 선물이 될 것이다. 이제 시민과 정치인과의 본격적인 관계가 시작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