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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단 건반, 60개 버튼, 6000개 파이프 “오르간은 집, 어떤 소리 채울지 고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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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서울 잠실의 롯데콘서트홀의 오르간 연주 모습. [사진 롯데콘서트홀]

서울 잠실의 롯데콘서트홀의 오르간 연주 모습. [사진 롯데콘서트홀]

‘820’ ‘25’ ‘2053’ ‘2061’ …. 오르가니스트 김희성의 악보는 난수표처럼 숫자가 빼곡하다.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가 바흐의 이름 B·A·C·H를 음으로 치환해 만든 작품 ‘바흐 주제에 의한 전주곡과 푸가’다. 김희성은 작은 포스트잇에 번호를 적어 악보의 거의 모든 마디에 붙여놨다. 어떤 곳에는 한 마디 안에도 여러 번호가 붙어있다.

“연주곡의 부분마다 미리 정해놓은 소리 조합의 번호에요.” 김희성이 이화여대 김영의홀의 파이프 오르간에 ‘2053’을 입력하자 건반 왼쪽에 단추처럼 생긴 스톱(stop) 여러 개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스톱이 어떤 건 들어가고 어떤 건 나오며, 조합된 소리가 울린다. ‘2061’로 바꾸면 스톱들은 또 다른 조합으로 들어가거나 나온다. 오르간 주자에게 연주는 음표의 재현이라기보다 소리의 설계에 가깝다. 설계 방법은 무한하다. 오르가니스트들은 음악의 모든 부분에서 소리를 상상하며 악기를 미리 세팅한다. “음악가도 자세히 알기 힘든 악기”(오르가니스트 신동일)인 오르간에 관해 연주자들 이야기를 들어봤다.

오르간의 소리를 내는 파이프. [사진 롯데콘서트홀]

오르간의 소리를 내는 파이프. [사진 롯데콘서트홀]

이름 그대로 파이프, 즉 길쭉한 관에서 소리가 난다. 이 각기 다른 소리를 내는 파이프를 고르는 장치가 스톱이다. 연주자는 스톱으로 파이프를 조정해, 수없이 많은 조합의 음색을 낼 수 있다. 파이프 개수는 오르간이 들어가는 공간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신동일은 “오르간은 악기를 들여놓는 것이 아니고, 공간에 맞춰 ‘짓는다(build)’고 표현하는 만큼 공간에 따라 규모와 소리의 종류에서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 애틀랜틱시티 보드워크홀의 오르간을 예로 들었다. 1932년에 지은 이 오르간은 3만개 넘는 파이프와 200여개의 스톱을 가지고 있다. 규모 면에서 세계 최대로 꼽힌다.

대부분의 정식 공연장 파이프 오르간은 수천개의 파이프와 수십 개의 스톱으로 구성된다. 건반은 4단에서 6단까지 오르간마다 다르고, 발로 누르는 건반이 30여개다. 한국에서 가장 큰 파이프 오르간은 세종문화회관에 있는데, 1978년 개관 때 함께 지어졌다. 파이프 8098개, 스톱 97개, 6단 건반이다. 서울 양재동 횃불선교센터 대형 파이프 오르간은 파이프 6143개, 스톱 78개, 건반 4단인데, 1992년 들어갔다. 최신 파이프 오르간은 2016년 개관한 서울 롯데콘서트홀에 있다. 파이프 5000여개, 스톱 68개, 건반 4단이다.

여러 종류 소리의 파이프를 연주자가 선택할 수 있는 스톱 장치. [사진 롯데콘서트홀]

여러 종류 소리의 파이프를 연주자가 선택할 수 있는 스톱 장치. [사진 롯데콘서트홀]

오르가니스트들은 발로는 주로 낮은 음을 연주하고, 두 손으로는 여러 단의 건반을 누르는 동시에 스톱을 계획에 맞게 조정하면서 연주한다. 신동일은 “연주할 오르간마다 세부사항을 미리 자료로 받아 연구하고, 거기에 맞는 연주 방법을 계획한다”며 “한 시간 반 공연한다 치면 악기 세팅에 10시간 정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다른 악기와 함께하는 앙상블 때 오르간 연주자의 고충은 커진다. 김희성은 “다른 악기 연주자는 ‘그 부분에서 소리를 작아지게 연주합시다’라고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오르가니스트는 세팅을 다시 해서 시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음량을 키우거나 줄이는 일조차 오르가니스트에게는 미리 계획하고 세팅해야 하는 작업이다.

롯데콘서트홀은 공연장의 오르간을 소개하는 시리즈 ‘오르간 오딧세이’를 올해 3차례 무대에 올린다. 지난달 16일 첫 무대에서는 해설자인 성악가 김세일이 무대 뒤쪽 오르간 내부로 들어가 영상으로 생중계했다. 덕분에 청중은 바람이 들어가 모이는 곳, 풍압을 조절하는 벽돌, 소리를 전달하는 파이프까지 볼 수 있었다. 김세일은 3층 건물 높이의 오르간 내부를 살펴보고는 “내가 노래 부르는 원리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했다. 바람을 만들고 음색을 결정해 내보내면서 음악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당시 출연자인 오르가니스트 박준호는 “여러 부분의 유기적(organic) 연결 때문에 소리가 나기 때문에 ‘오르간’이라는 이름이 적절하다고 느낀다”고 했다.

오르간 연주자들은 악기의 이런 복잡성, 무한한 가능성에 매료된다. 신동일은 “새로운 공연장에서 오르간의 특성을 파악하고 음색을 세팅하는 과정은 사람을 소개받아 알아가고 함께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했다. 김희성은 “모든 오르간이 새 집과 같다. 그 안에 무엇을 채울지 고민하는 게 오르가니스트의 일”이라며 “무궁무진한 가능성에서 소리를 골라 채워 넣으면 마음이 충만해진다”고 말했다.

롯데콘서트홀 ‘오르간 오딧세이’는 7월 20일과 12월 21일 열린다. 5월 10일에는 영국 오르가니스트 데이비드 티터링톤이 롯데콘서트홀에서 연주한다. 오르가니스트 김희성은 1995년부터 매년 독주회를 여는데, 올해는 프랑시스 풀랑크의 오르간 협주곡을 편곡해 카로스 타악기 앙상블과 함께 연주하는 순서가 있다. 4월 11일 오후 7시 30분 롯데콘서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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