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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단 건반, 60개 버튼, 30개 페달…'극한 직업'인 오르간 연주의 매력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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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지난달 롯데콘서트홀에서 3층 건물 높이의 오르간 안에 들어가 해설하는 성악가 김세일. [사진 롯데콘서트홀]

지난달 롯데콘서트홀에서 3층 건물 높이의 오르간 안에 들어가 해설하는 성악가 김세일. [사진 롯데콘서트홀]

‘820’ ‘25’ ‘2053’ ‘2061’. 오르가니스트 김희성의 악보에는 암호 같은 숫자가 빼곡하다.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가 바흐의 이름 BㆍAㆍCㆍH를 음으로 치환해 만든 작품 ‘바흐 주제에 의한 전주곡과 푸가’다. 김희성은 작은 포스트잇에 번호를 써넣어 악보의 거의 모든 마디에 붙여놨다. 어떤 곳에는 한 마디 안에도 여러 번호가 붙어있다.

복잡하고 무한한 파이프오르간의 세계 #악기는 3층 높이, 수천개의 파이프로 음색 조합 #오르간 연주자들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매료"

“연주곡의 부분마다 미리 정해놓은 소리 조합의 번호에요.” 그가 이화여대 김영의홀의 파이프 오르간에 '2053’을 입력하자 건반 왼쪽에 단추처럼 생긴 스톱(stop) 여러 개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어떤 스톱은 들어가고, 어떤 것은 나오며 조합된 소리가 울린다. 연주자가 ‘2061’로 숫자를 바꾸면 스톱들은 또 다른 조합으로 들어가거나 나온다. 숫자의 변화, 스톱 조합의 변화에 따라 소리의 색채가 바뀐다.

파이프 오르간의 건반 옆에 있는 여러 개의 스톱.

파이프 오르간의 건반 옆에 있는 여러 개의 스톱.

오르간 주자에게 연주는 음표의 재현이라기보다 소리의 설계에 가깝다. 설계의 방법은 무한하다. 오르가니스트들은 음악의 모든 부분에서 소리를 상상하며 악기를 미리 세팅한다. “음악가들도 자세히 알기 힘든 악기” (오르가니스트 신동일)인 오르간에 대해 연주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미국 LA 크라이스트 성당 오르간의 파이프들. [AP=연합뉴스]

미국 LA 크라이스트 성당 오르간의 파이프들. [AP=연합뉴스]

이름 그대로 파이프, 즉 길쭉한 관이 소리를 낸다. 이 각기 다른 소리를 내를 파이프를 고르는 장치가 스톱이다. 연주자는 스톱으로 파이프를 조정해, 수 없는 조합의 음색을 낼 수 있다. 파이프의 개수는 오르간이 들어가는 공간의 크기에 따라 얼마든지 많아질 수 있다. 신동일은 “오르간은 악기를 들여놓는 것이 아니고 공간에 맞춰 ‘짓는다(build)’는 표현을 하는 만큼 공간에 따라 규모와 소리의 종류에서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 애틀랜틱시티 보드워크홀의 오르간을 예로 들었다. 1932년에 지어진 이 오르간은 3만개 이상의 파이프, 200여개의 스톱을 가지고 있다. 컨벤션센터, 아이스하키장으로도 쓰이는 만큼 연주를 위한 음향 수준은 충분치 못해도 규모 면에서 세계 최대로 꼽힌다.

정식 공연장의 대부분 파이프 오르간은 수천개의 파이프, 수십 개의 스톱으로 구성된다. 건반은 4단에서 6단까지 오르간마다 다르고, 발로 누르는 건반은 30여개다. 한국에서 가장 큰 파이프 오르간은 세종문화회관의 1978년 개관과 함께 지어졌다. 파이프 8098개, 스톱 97개, 6단 건반이다. 서울 양재동의 횃불선교센터에는 파이프 6143개, 스톱 78개, 건반 4단의 대형 파이프 오르간이 1992년 들어갔다. 최신형 파이프 오르간은 2016년 개관한 서울 롯데콘서트홀에 있다. 파이프 5000여개, 스톱 68개, 건반 4단이다.

오르가니스트들은 발로 주로 낮은 음을 연주하고, 두 손으로는 여러 단의 건반을 누르는 동시에 스톱을 계획에 맞게 조정하면서 연주한다. 신동일은 “연주하게 될 오르간마다 세부사항을 미리 자료로 받아 연구하고, 거기에 맞는 연주 방법을 계획한다”고 설명했다. 또 “한 시간 반 공연을 한다 치면 악기 세팅에 10시간 정도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롯데콘서트홀의 오르간 공연 장면. [사진 롯데콘서트홀]

롯데콘서트홀의 오르간 공연 장면. [사진 롯데콘서트홀]

그러다 보니 다른 악기와 함께 하는 앙상블에서 오르간 연주자의 고충이 커진다. 김희성은 “다른 악기 연주자들은 ‘그 부분에서 소리를 작아지게 연주합시다’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하면 오르가니스트들은 세팅을 다시 해서 시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음량을 키우거나 줄이는 일조차 오르가니스트에게는 미리 계획해야 하는 작업이다.

롯데콘서트홀은 공연장의 오르간을 소개하는 시리즈 ‘오르간 오딧세이’를 올해 3회 무대에 올린다. 지난달 16일 첫 무대에서는 해설자인 성악가 김세일이 무대 뒤쪽에 있는 오르간 내부로 들어가 영상으로 생중계했다. 바람이 들어가 모이는 곳, 풍압을 조절하는 벽돌, 소리를 전달하는 파이프까지 청중이 볼 수 있었다. 김세일은 3층 건물 높이의 오르간 내부를 살펴보고 “내가 노래 부르는 원리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했다. 바람을 만들고 음색을 결정해 내보내면서 음악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당시 출연자였던 오르가니스트 박준호는 “여러 부분의 유기적(organic) 연결 때문에 소리가 나기 때문에 ‘오르간'이라는 이름이 적절하다고 느낀다”고 했다.

오르가니스트 김희성이 이화여대 김영의홀에서 오르간을 설명하며 연주하는 장면.

오르가니스트 김희성이 이화여대 김영의홀에서 오르간을 설명하며 연주하는 장면.

이처럼 오르간 연주자들은 악기의 복잡성, 무한한 가능성에 매료된다. 신동일은 “새로운 공연장에서 오르간의 특성을 파악하고 음색을 세팅하는 과정은 사람을 소개받아 알아가고 함께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했다. 김희성은 “모든 오르간은 새로운 집과 같다. 그 안에 무엇을 채워나갈지의 고민이 오르가니스트의 일”이라며 “무궁무진한 가능성에서 소리를 골라 채워 넣으면 마음이 충만해진다”고 말했다.

오르간의 무한한 색을 볼 수 있는 무대가 계속된다. 롯데콘서트홀 ‘오르간 오딧세이’는 7월 20일, 12월 21일 열린다. 5월 10일에는 영국 오르가니스트 데이비드 티터링톤이 롯데콘서트홀에서 연주한다. 오르가니스트 김희성은 1995년부터 매년 독주회를 열고 있는데, 올해는 풀랑크의 오르간 협주곡을 편곡해 카로스 타악기 앙상블과 함께 연주하는 순서가 있다. 4월 11일 오후 7시 30분 롯데콘서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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