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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전ㆍ현직 대사들이 보는 우크라이나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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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이 훌쩍 지났다. 세계 2위의 군사 대국 러시아가 며칠 만에 수도 키이우를 점령하고 우크라이나는 길어야 2∼3주를 못 버틸 것이라던 초반의 예상은 이미 깨졌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불굴의 용기와 항전 의지로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러시아의 고전(苦戰)이 장기화되면 자승자박의 결말로 끝났던 옛소련 시절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재판이 될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전 세계가 유례없이 일치된 목소리로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는 대열에 섰다는 점이다. 만장일치에 가까운 유엔 결의안 표결과 사상 최강도의 대 러시아 제재뿐 아니라 민간ㆍ시민 차원에서의 국제 연대도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이는 국제사회가 이번 전쟁을 지역분쟁 차원이 아니라 권위주의 체제와 자유민주 진영간의 가치 대결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향후 국제질서의 변화로도 이어질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닌 이유다. 우크라이나의 최근 동향과 주변 정세를 현장에서 주시해 온 전ㆍ현직 주(駐)우크라이나 대사 3명의 시각을 통해 우크라이나 사태의 함의와 교훈을 짚어 보았다.
2016∼2019년에 우크라이나에서 근무한 이양구 전 대사와 2019∼2021년에 근무한 권기창 전 대사가 인터뷰에 응해줬다. 전황 파악과 교민 안전 업무에 분주한 김형태 대사는 안부 인사를 겸한 몇 차례 통화에서 현지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푸틴에겐 패권 경쟁이나 자유 진영엔 가치 경쟁" #예상 뛰어넘는 우크라이나의 결연한 항전은 자유를 향한 열망의 표출 #푸틴의 2014년 크림 병합 계기로 탈러시아 유럽 지향의 정체성 확립 #선진국 진입한 한국은 국격 걸맞은 가치 기반 외교로의 전환점 삼아야

우크라이나 전쟁의 함의와 교훈에 대해 전·현직 우크라이나 대사로부터 의견을 들었다. 사진 왼쪽부터 김형태 주우크라이나 대사, 이양구 전 대사, 권기창 전 대사. 김경록 기자,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의 함의와 교훈에 대해 전·현직 우크라이나 대사로부터 의견을 들었다. 사진 왼쪽부터 김형태 주우크라이나 대사, 이양구 전 대사, 권기창 전 대사. 김경록 기자, [연합뉴스]

-전쟁이 터지면 해외로 떠나는 행렬을 많이 보는데 우크라이나 국민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현장에서 보기엔 어떤가.
^김형태: “언제 어느 곳에서 총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맨손으로 러시아군 탱크 앞을 막아서는 모습에서 숙연함과 함께 감동을 느낀다. 그런 용기는 이미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졌지만 한 가지 더 보태고 싶은 것은 성숙한 시민의식이다. 전쟁 와중에도 범죄나 사회적 혼란이 없고 상부상조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있다. 사재기 현상도 거의 없다. 생필품 마트나 주유소에서 서너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들이 매우 인상적이다. ”
-러시아가 2014년 크림 반도를 무력으로 병합했을 때 우크라이나는 총 한 번 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무엇이 8년만에 우크라이나를 이렇게 달라지게 했나.
^김형태: “지도자들의 리더십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해 신임장 제정하느라 젤렌스키 대통령과 면담할 때 그가 한 첫마디가 ‘우리는 8년째 전쟁 중’이란 말이었다. 지금처럼 전투가 벌어지거나 일촉즉발의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대통령은 전시 지도자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니 이번 침공 직후 미국으로부터 탈출 제의를 받았을 때에도 ‘내게 필요한 것은 탈 것이 아니라 탄환’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도자가 앞장서니 국민들이 믿고 따르는 것이다.”
^권기창:“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역사적 뿌리를 공유하는 관계인데 2014년 크림반도 병합을 계기로 러시아는 더 이상 형제가 아니란 인식이 퍼졌다. 현지인들로부터 러시아를 적(enemy)이라 표현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말로만 분개한 것이 아니라  미국ㆍ유럽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고 안보태세를 강화해왔다. 미국도 해마다 4억∼5억 달러씩 무상 군사지원을 해왔다. 동맹국이 아닌 나라에 군사지원을 하는 것은 대단히 예외적인 일이다. 크림반도 병합 당시에 러시아에 대항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 군대는 5000명 수준에 장비는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상비군이 20만 명에 이른다.”
^이양구:“근본적으로는 자유와 독립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갈망이 뿌리에 있다. 키이우 중심부 유로마이단 광장에는 ‘자유는 우리의 종교다‘란 표어가 적혀있다. 러시아의 크림 병합은 러시아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을 자극했고 우크라이나인들이 온전한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됐다. 러시아에 대한 앙갚음은 러시아와 다른 길을 걷고, 그들보다 좋고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데 있다는 생각들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서방으로의 지향이 더 강해졌다. 어림잡아 2014년 이전에 친서방과 친러시아의 비중이 6:4 정도였다면 지금은 8:2로 바뀌었다. ”
우크라이나를 자국 영향권하에 묶어둠으로써 과거 옛소련 시절의 패권을 회복하려는 러시아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우크라이나로 하여금 러시아로부터 벗어나려는 국가 의지를 확립하게 되는 전환점이 2014년 푸틴의 크림 병합이었으며 이번 침공으로 더욱 강해졌다는 분석이다.
-결국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오판을 했다는 얘기인가.
^권기창: “푸틴이 세 가지 오판을 했다는 얘기가 있다. 첫째 우크라이나가 이렇게 셀 줄 몰랐고, 둘째로 러시아의 군사력이 이렇게 약할 줄 몰랐다는 점이다. 셋째는 서방 세계가 이렇게 단결할 줄을 푸틴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
^이양구: “푸틴의 입장에서 이번 전쟁은 패권경쟁일지 모르지만, 서방의 관점에선 가치의 경쟁이다. 미국과 유럽은 푸틴이 정의와 공정, 정직, 자유, 휴머니즘 등 자유민주주의의 핵심가치에 도전한 것으로 본다. 2차대전 이후,짧게 보면 냉전 종식 이후의 질서와 체제를 푸틴이 해체하겠다고 위협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 첫 단추가 우크라이나였는데 이를 서방은 묵과할 수 없다. 푸틴은 집권 이래 체첸,조지아, 크림 등 옛 소련 영향권에서의 군사행동에서 모두 속전속결로 성공했다.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통하지 않았다. ”
-가치 경쟁과 국제질서에 대한 위협이란 관점에서 보면 이번 사태는 우리나라와도 무관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한국도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 지원에 동참하는 게 옳지 않나. 정부는 러시아와의 관계나 경제 교역 등을 의식해 초기에 소극적으로 대응해 비판을 받았다.
^권기창:“이제 한국은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선진국이자 자유민주주의 모범국가다. 한국의 인도적 지원액이 1000만 달러 수준인데, 일본은 1억 달러에 이어 추가로 1억 달러를 더 낸다고 한다. 우리 경제력에 맞춰 보면 더 지원하는 게 맞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한국  외교는 경제적 이익 중심의 판단을 했는데 이번을 계기로 그런 패턴을 바꾸길 희망한다. 단기적으로는 경제적으로 조금 손해보더라도 가치에 기반한 외교를 하는 것이 중장기적 국익에 맞다. 이제는 그럴 때가 됐다.
아쉬운 게 하나 있다. 2014년 이후 해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유엔에 제출해 표결이 이뤄지고 있다. 한국은 계속 기권표를 행사해왔다. 주요 선진국 가운데 기권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영토 주권을 존중하고 외부 침략에 반대한다는 기본 입장에 따르면 찬성표를 던지는 게 옳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각국 의회에 영상 연설로 지지를 호소하고 있는데, 한국 국회에도 요청을 해 온 상태라고 한다. 이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 ”
^김형태: “현장에서 보니 한국은 우크라이나에서는 주요 7개국(G7) 급의 대접을 받고 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인 시련의 역사를 딛고 선진국으로 성장한 한국을 우크라이나가 롤모델로 삼고 있다는 얘기도 자주 듣는다. 이번 전쟁이 터진 후에도 도와 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고 있다. 2월 24일 러시아 침공이 터진 이후 주요 국가들이 대사관을 폴란드 등 인접국으로 철수시켰는데 우리는 서부지역인 체르니우치로 옮겨오긴 했지만 주요국가 가운데 영토 내에 대사관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다. 이곳 주지사로부터도 ‘함께 있어주니 큰 힘이 된다’는 말을 들었다. 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말의 무게를 절감하고 있다.”
^이양구: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감한다. 우크라이나를 돕는 것이 길게 보면 러시아를 돕는 것이다. 러시아는 군사력에 비해 정치ㆍ경제 발전이 뒤처진 불균형 국가로서의 문제점을 이번에 여실히 드러냈다. 이번 사태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되고 러시아의 정치발전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