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잡스'가 크고 있다…강남·구로·관악 골목이 분주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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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2017년 서울 관악구에서 문을 연 ‘랭디’는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려는 일반인·학생들과 원어민을 연결해 주는 온라인 외국어교육 플랫폼이다. 일반적인 ‘전화영어’ 등과 달리 여러 원어민과 대화할 수 있게 한 게 특징이다.

랭디는 창업 초기 서울대와 관악구가 지원하는 창업센터에 입주했다가 지난해 관악구 봉천동으로 이전했다. 설립 5년 만에 연매출 수십억 원대의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새 사무실을 꾸리고 독립했다. 같은 기간 직원 수도 20여 명으로 늘어나면서 지자체 창업센터의 성공사례로 꼽혀왔다.

관악S밸리 입주 기업 현황. 그래픽= 전유진 yuki@joongang.co.kr

관악S밸리 입주 기업 현황. 그래픽= 전유진 yuki@joongang.co.kr

랭디는 앞으로 공간을 따로 마련해 토론이나 대화 등 사람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오프라인 플랫폼을 만드는 게 목표다.

우상욱 랭디 대표는 28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초기 투자유치를 바탕으로 성장한 회사들과 달리 투자금 없이 회사를 키우려다 보니 광고를 할 여력조차 없었다”며 “10명이 일할 수 있는 공간을 연 20만 원으로 임차할 수 있는 창업센터에 입주한 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지난 2017년 관악구의 창업지원센터에서 문을 열어 5년차에 독립한 '랭디' 사무실 모습. [관악구]

지난 2017년 관악구의 창업지원센터에서 문을 열어 5년차에 독립한 '랭디' 사무실 모습. [관악구]

관악구 일대가 ‘관악S밸리(실리콘밸리)’로 불리며 창업의 허브로 뜨고 있다. 랭디처럼 시·구의 지원을 받아 창업한 기업 112개(직원 수 711명)가 모여 있는 공간이다.

이곳은 지자체가 직접 예산을 투입하고 200억 원 규모의 창업지원펀드를 조성해준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창업센터만 13개를 열어줌으로써 지난 1월에는 벤처기업육성촉진지구로도 선정됐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취득세·재산세 37.5% 감면 혜택 등을 주는 제도다.

서울시는 이보다 앞서 창업의 메카가 된 강남 테헤란밸리, 구로G밸리 등을 연결하는 등 권역별 캠퍼스타운 밸리를 조성하기로 했다. 그간 베드타운 성격이 강했던 관악구에서의 창업이 활성화한 데 따른 효과다. 서울시가 내놓은 ‘2025 서울청년 종합계획’에 따르면 시는 해당 분야에 2390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청년계획에 따르면 향후 동북권은 고려대·경희대 등 선도대학과 홍릉바이오클러스터를 연계하고, 서남권의 중심은 관악S밸리가 중심이 된다. 서북권은 신촌 일대의 대학들을 연계한 청년창업 메카를 조성한다. 서울시는 3대 권역별 밸리를 통해 청년이 도약할 수 있는 창업생태계를 만드는 게 목표다. 대학-대학, 대학-창업지원시설을 연결해주고, 미래혁신성장펀드 등 정책적 자원을 총동원하겠다는 게 기본 취지다.

돌봄이 필요한 어르신과 요양보호사를 매칭해주는 한국시니어연구소 이진열 대표가 중앙일보와 28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관악구]

돌봄이 필요한 어르신과 요양보호사를 매칭해주는 한국시니어연구소 이진열 대표가 중앙일보와 28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관악구]

서울시의 이번 계획은 그간 기초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은 기업들이 다양한 아이디어로 창업에 성공한 이력이 검증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돌봄이 필요한 어르신과 요양보호사를 매칭해주는 한국시니어연구소 역시 2019년 관악구 지원을 받아 창업한 뒤 월매출 15억 원, 직원 22명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진열 시니어연구소 대표는 “보호자라고 해도 정작 가족이 요양보호 대상이 됐을 때는 어떤 것이 필요한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상담을 통해 요양보호사의 성격이나 특징부터 이동식변기, 전동침대 등 어떤 기구가 필요한지를 구체적으로 설계하는 사업”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요양기관이 장기요양서비스를 제공하고 비용의 85%를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지원받고 있는데 행정이 고도화되지 못하다 보니 사업비 지출을 증빙하는 등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많다”며 “요양 서비스를 제공하는 요양기관의 행정, 마케팅 등을 지원하는 역할도 사업의 하나”라고 했다.

강남구 역시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 ICT 사업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 현재 강남에는 서울 전체의 스타트업(1만35곳) 가운데 21.2%(2115곳) 이상이 밀집해 있다. 강남구는 지난해 6월부터 315억 원 규모의 ‘강남창업펀드(스마트SF-WE언택트펀드2호)’를 조성했다. 이를 토대로 구 출자금(10억 원)의 500% 이상을 강남구 소재 기업에 의무적으로 투자하도록 함으로써 당초 200%였던 의무투자비율을 크게 늘렸다.

이 같은 투자가 일회성 지원에 그쳐서는 효과가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정재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정부의 청년창업가 양성 프로그램인 ‘청년창업사관학교’ 1~6기(2011~2016년) 지원 기업 중 67.7%은 2020년 현재 매출이 ‘0원’인 것으로 파악됐다. 7~10기도 31.5%는 매출을 올리지 못한 채 폐업하거나 법인만 겨우 유지하고 있다.

김 의원은 “목표 수치만 채우자는 식의 단순한 ‘묻지마식’ 현금 지원으로 생색만 내서는 결코 청년 창업 활성화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며 “규제 완화와 창업환경 조성 등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청년들이 무턱대고 창업에 뛰어드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오랜 준비작업 없이 창업하는 분위기가 강할 경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 지원이 될 가능성이 높아서다. 이상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창업이 마치 취직의 대안으로 인식되면서 무분별하게 일찍 창업에 뛰어드는 경우들이 있다”며 “패기와 열정도 중요하나 이것만 갖고 창업하면 실패 확률도 높은 만큼 면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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