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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경쟁자 정책 수용으로 통합의 정치 실천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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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 앞은 요즘 '집회 1번지'다. 28일에도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이 다단계 하도급 금지 등을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연합뉴스]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 앞은 요즘 '집회 1번지'다. 28일에도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이 다단계 하도급 금지 등을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연합뉴스]

일요일인 27일 오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자리 잡은 서울 종로구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 앞. 평일엔 각종 단체의 시위와 기자회견으로 몸살을 앓는 곳인데, 이날은 조용했다. 연수원 주변도로는 경찰 차량과 펜스가 둘러쌌다. 도로 양쪽을 빈틈없이 차지하고 있는 색색의 플래카드를 보며 이곳이 요즘 ‘집회 1번지’임을 새삼 느꼈다.

[아까운 대선 공약 다시 보기] #대선 정국에서 사라진 정책 경쟁 #'아까운 낙선자 공약’ 논의도 실종 #디지털 대전환, 신산업정책 등 #대전환기 국정과제 혼자 못 풀어 #새정부 정책 취사선택하는 인수위 #전문가들의 좋은 정책 경청했으면

비호감 선거, 진영 선거로 치러진 이번 대선은 정책 경쟁이 활발하지 않았다. 선거 이후에도 관심 없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2017년 19대 대선이 끝난 뒤에는 언론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낙선 후보들의 이런저런 공약은 그냥 버리기 아깝다는 논의가 있었다. 심상정 후보의 슈퍼우먼방지법이나, 박근혜 정부 때 만든 창조경제혁신센터를 민간주도로 전환해 활용하자는 안철수·유승민 후보의 공약이 그런 평가를 받았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8일 서울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에 마련된 인수위원회를 나서고 있다. [인수위 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8일 서울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에 마련된 인수위원회를 나서고 있다. [인수위 사진기자단]

“이재명의 디지털대전환 공약에 관심을”

이번 대선에선 낙선자의 어떤 공약에 주목해야 할까. 이재명 캠프에서 전환적공정성장전략위원장을 맡았던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디지털 대전환 공약을 꼽았다. 하 교수는 “디지털 전환에는 기업 스스로 하기 힘들거나 시장에 맡겨선 부족한 부분이 있다”며 “디지털 전환이라는 거대한 변화에 뒤처지는 이들을 교육과 직업훈련 등으로 보듬어야 전환에 대한 저항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신산업정책도 강조했다. 그는 “윤석열 캠프에선 민간 주도를 강조했지만 안정되고 평화로운 시기가 아니라 요즘처럼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할 때에는 리스크가 큰 핵심전략 기술은 국가가 챙겨야 한다”고 했다.

대선판에서 정책이 힘을 못 쓰면서 많이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치열한 정책 경쟁을 기대하며 대선 정국에 뛰어든 아이디어가 꽤 있었다. 지난 봄 이후 의미 있는 어젠다를 담아 출간된 책도 여럿이다. 역시 그냥 버리기엔 아깝다.

“부의 소득세, 한국은 시도해볼 만”

 『경제정책 어젠다 2022』

『경제정책 어젠다 2022』

『경제정책 어젠다 2022』(김낙회·변양호·이석준·임종룡·최상목 지음):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 등 전직 경제관료들이 썼다. 윤석열 당선인의 특별고문인 이석준 전 국무조정실장, 인수위 경제1분과 간사인 최상목 전 기획재정부 차관도 저자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아이디어인 부(負)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 이하 NIT) 도입이 핵심주장이다. NIT는 소득이 많으면 높은 세율을, 적으면 낮은 세율을 적용하고, 기본생활도 못 할 정도로 조금밖에 못 번 사람에겐 정부가 보조금 형태의 급여를 주는 방식이다. 성인에게 월 50만원, 18세 이하에겐 월 30만원의 급여를 보장할 경우 연 170조원의 재원이 필요하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기초생활보장제도 등 기존 급여성 복지프로그램을 일괄적으로 정리하고, 필요하면 부가세를 높여서 재원을 조달하자고 제안한다.

NIT를 전면적으로 실시하는 나라는 아직 없다. 내용이 너무 파격적이어서 기존 복지를 없애는 과정에서 정치적 저항이 크고, 세정(稅政) 능력이나 정보기술(IT)도 모자랐기 때문이다. 변양호 전 국장은 지금 한국의 세정 능력과 IT 수준이라면 NIT를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NIT로 사회안전망을 마련하고, 다른 나라도 하는 비즈니스라면 우리도 할 수 있게 규제를 과감하게 개혁하며, 비지배주주와 이해관계자 권익을 보호하는 기업 지배구조 혁신을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패키지딜로 동시에 도입하자고 제안한다.

“역대 정권의 폭탄 돌리기 끝내자”

 『어젠다 K 2022』

『어젠다 K 2022』

『어젠다 K 2022』(한국공공정책전략연구소 지음): 김성식·김관영·채이배 전 의원 등이 “어느 정파에도 얽매이지 않고” “여야 모두의 정책적 진화를 추동하겠다”는 목표로 연구를 주도했다. 문제의식은 신랄했다. “역대 정권은 선거에 이기기 위해 신기루를 띄웠다. 대부분의 정권은 단기 경제 수치에 매여 땜질 처방을 반복하며 폭탄 돌리기를 해왔다. 융합적인 해법이나 굵직한 전환의 돌파구는 승자독식 이분법 정치와 청와대 비서 중심의 국정으로는 기대할 수 없는 고난이도 과제였다.”

혁신친화적인 사회투자국가를 비전으로 내세우며 ‘혁신-고용-복지’의 패키지딜과 인적투자 정책이 결합된 융합 해법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사각지대 없이 복지를 튼튼히 해야 혁신의 수용성을 높일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 변양호 전 국장 등과 출발점은 같다. 하지만 NIT는 현실적이지 않다고 봤다. 기존 복지제도와의 통폐합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재정이 감당할 수 없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에도 반대한다. 이들의 대안은 사회보험의 확대와 생활보장의 강화를 내용으로 하는 국민소득보장제다. 생애 특정 기간에 특정 활동에 한해 기본소득을 적용하는 것과 비슷하다.

청년 문제에 대한 고민도 신선했다. “청년 어젠다의 출발점은 젊은 세대의 삶에 대한 감수성부터 키우는 것이다. 그들을 대변하겠다는 접근 대신 청년 스스로 대표할 수 있도록 정치공간을 비롯, 참여의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다.…차기 정부 5년은 세대 간 공정성을 따져보고 주요 정책에 반영하는 첫 5년이 되어야 한다.”

여야를 함께 비판하며 청산과 배제의 진영 정치를 끝내자는 의기투합으로 시작했지만 대선판 현실정치의 구심력은 강했다. 김관영·채이배 전 의원은 민주당으로 복당했고, 윤영일 전 의원은 윤석열 캠프로 흩어졌다. 연정을 주장한 김성식 전 의원은 어느 쪽 캠프에도 가지 않았다.

“대기업 이익 공유보다 역량 공유 필요”

 『혁신의 시작』

『혁신의 시작』

『혁신의 시작』(서울대 한국경제혁신센터 등 엮음):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8인의 제언을 모았다. 인수위 경제1분과 김소영 교수도 저자에 이름을 올렸다. 거시경제 챕터를 썼는데 학자 특유의 신중함이 느껴진다. 고령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대외 금융자산 투자를 늘리고 선진국은 물론 개도국보다 떨어지는 대외자산 수익률도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앞으로 ‘서학개미’가 더 늘어나야 한다는 얘기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격차와 관련, “대기업의 이익 공유보다 역량의 공유”가 필요하다는 이근 교수의 주장은 곱씹어볼 만하다. 탄소중립 로드맵 걱정도 일리 있다. “구체적인 정부 지원방안이 빠진 탄소중립 목표 설정은 국내 기업환경을 크게 악화시킬 것이다. 리쇼어링을 추진하기 가장 좋은 시점에 오히려 국내 기업의 해외 이전을 촉발할 우려도 있다.”

소액주주 권리를 강화하는 대신, 지나친 기업활동 규제를 풀어주자는 주장(이상승 교수)도 패키지딜과 비슷하다. 소액주주 권리 강화는 증거개시(discovery) 절차의 도입이다. 민사 분쟁에서 소송의 한 당사자가 상대방에게 분쟁과 관련된 자료를 법원을 통해 요구하는 제도다. 소액주주가 피해를 봤을 때, 경영진이나 대주주가 보유한 자료를 확보해 손해를 금전적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 기업활동 규제 완화는 기업가를 과도하게 처벌하는 현재의 형사처벌관련조항을 대폭 축소하고 경영권 상속시 최대 65%에 달하는 상속세율을 수정하는 게 골자다.

최저임금에 대해 이정민 교수는 차등적용을 논의하기 전에 먼저 결정구조부터 바꾸라고 주문했다. 최저임금위원회에서 논의를 하되, 결정은 정부가 하고 책임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금기 깨기』

『대한민국 금기 깨기』

 『대한민국 판이 바뀐다』

『대한민국 판이 바뀐다』

 『재정전쟁』

『재정전쟁』

이밖에 『대한민국 금기 깨기』(김동연 지음), 『대한민국 판이 바뀐다』(김대환 외 지음), 『재정전쟁』(전주성 지음), 『정책의 시간』(원승연 등 지음) 등도 대선 국면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졌다. 김동연 새로운물결 대표(전 경제부총리)의 대선 출사표인 『대한민국 금기 깨기』는 다양한 정책 아이디어가 돋보였고 상당부분 그의 대선 공약이 됐다. 부자 과세의 필요성을 포함해 한국형 재정 로드맵을 담은 전주성 이대 교수의 『재정전쟁』은 새 정부의 전반적인 세제 개혁에 참고할 만하다.

인수위는 각 부처의 업무보고를 받으며 새 정부의 국정과제를 만들고 있다. 대선 공약의 재원 문제와 실현가능성 등을 따져 공약을 취사선택하고 실행할 공약은 더 뾰족하게 다듬는 과정은 인수위의 존재이유다.

지금 시급한 건 책임있는 연합정치

한발 더 나아가 대선판에서 제기됐던 여러 후보의 정책 공약도 열린 마음으로 점검했으면 한다. 지난 1년간의 대선 어젠다를 보면 ‘패키지딜’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유난히 많다. 자신의 지지층부터 한발 뒤로 물러나라고 설득해야 냉소적으로 뒷짐 지고 있는 상대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정책 주고받기를 기반으로 하는 책임 있는 연합정치가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다. 한 정당과 한 정권이 해결하기엔 지금 같은 대전환기에 우리 앞에 놓인 국정과제가 하나같이 간단하지 않다. 더구나 24만 표라는 ‘깻잎 한 장’ 차이로 집권한 정부 아닌가.

윤석열 인수위가 국정과제를 발표하면서 경쟁했던 후보의 공약 일부를 포함시키고 좋은 정책을 낸 후보에 감사를 표하는 멋진 그림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