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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봉길의 한반도평화워치

강대국의 거대 담론 파악해야 국가 안보 지킬 수 있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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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우크라이나 사태와 한국의 대응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24일 스웨덴의 회에서 러시아 침공에 대항하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달라는 화상 연설을 하자 의원들이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다. [AP=연합뉴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24일 스웨덴의 회에서 러시아 침공에 대항하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달라는 화상 연설을 하자 의원들이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다. [AP=연합뉴스]

2019년 여름 모스크바를 여행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를 방문했을 때다. 이 묘지에는 옐친 전 대통령, 흐루쇼프 전 공산당 서기장 등 많은 러시아 지도자들이 묻혀 있었다. 한쪽에는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부인 라이사의 무덤도 있었는데 그 옆자리에 빈터가 있었다. 안내인은 나에게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사망하면 그곳에 묻힐 것이라고 했다. 나는 모든 러시아의 정치 지도자들이 이곳에 묻히는지 궁금했다. 푸틴 대통령도 죽으면 이곳에 묻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푸틴은 절대 안 죽을 것이다!”(He will never die!)라고 대답했다.

모스크바에 이어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을 때다.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세련된 여성이 안내를 맡았다. 그는 고르바초프와 옐친 시대를 기억하고 있었다. 교수였던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퇴근 후에도 투잡을 뛰어야 했다. 경제적으로도 너무 어려웠고 무엇보다 사회가 극도로 혼란했다. 그는 푸틴이 독재자인 것은 맞다고 했다. 그러나 푸틴은 이러한 러시아에 질서와 안정을 가져왔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스톡홀름 신드롬’(인질로 잡힌 사람이 인질범에게 심리적으로 동조하는 증세나 현상)에 빠져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푸틴이 두렵지만, 푸틴이 없으면 러시아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나토 가입 추진, 제국에의 향수가 푸틴의 침공 배경
미·중·러는 동맹·미사일방어망 등 군사 안보 과제에 고도로 민감
한반도 외교·안보 이슈를 큰 스케일의 국제정치 안목에서 봐야
‘인도태평양판 나토’라는 쿼드 참여와 사드 추가 배치 신중해야

러시아와 중국의 ‘잃어버린 제국’ 향수

한 나라의 대외 정책, 특히 한때 제국(帝國)을 유지했던 나라의 외교·안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역사를 깊이 있게 알아야 한다. 주러시아 대사와 국무부 부장관을 역임한 미국의 대표적인 러시아통 윌리엄 번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푸틴의 무모할 정도로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소련의 붕괴와 상처받은 민족적 자존심, 그리고 고르바초프·옐친 시대의 무질서와 혼란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2019년 출간한 회고록 『막후 채널』(Back Channel)에서 한 이야기다.

우리와 이웃한 또 하나의 제국, 중국의 대외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상처받은 역사인 ‘치욕의 한 세기’(Century of humiliation)를 알아야 한다. 19세기 초엽부터 거의 100년 동안 중국은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온갖 수모를 당했다. 1860년에는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침공해 청의 여름 궁전 원명원(圓明園)이 불탔다. 막대한 문화재들이 약탈당했다. 시진핑 시대의 국가 비전인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中國夢)도 이러한 아픈 역사적 배경을 깔고 있다. 과거 화려했던 제국에 대한 향수다.

중국은 마오쩌둥 시대에 문화혁명(1966~76)이라는 극심한 대란을 겪었다. 무질서와 혼란에 대해 엄청난 공포를 가지고 있다. 그 후 2012년 시진핑 집권 이래 전방위적인 반부패 사정 드라이브로 400만 명이 숙청되었다. 장관급 이상만 400명 가까이 된다. 당국의 기업 규제를 비판했던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도 근신에 들어갔다. 중국 전체에 긴장감이 돌 수밖에 없다. 스트롱맨의 시대다. 올가을 중국공산당 20차 당 대회를 통해 예상되는 시진핑 주석의 장기 집권도 이러한 역사적·정치적 배경을 깔고 있다.

강대국의 거대담론, 동맹과 미사일방어망

미국·중국·러시아 등 강대국의 국제정치 담론은 보통국가와 다르다. ‘동맹’과 ‘미사일방어망(MD)’ 등 군사 안보 과제에 극히 민감하다. 제국을 어떻게 유지하고 방어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번스 국장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일찍이 우크라이나 사태를 예측하면서 동맹과 미사일방어 시스템 이슈가 가지는 민감성을 이야기했다. 나는 주인도 대사로 근무하던 2019년 11월 그가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뉴델리를 방문했을 때 만났다. 훤칠하고 잘 생긴 용모의 그는 매우 겸손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국인 한국에 대해 5조~6조원 규모의 방위비 지급을 요구한 것에 대해 “주한미군이 용병이냐”며 혀를 차며 비판했다.

번스의 회고록에는 2007년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였던 그가 나토(NATO)의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로의 팽창이 가져올 후과를 경고하는 내용이 나온다. 미국이 이 문제에 극히 신중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건의를 긴 개인 e메일을 통해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보냈다. 그는 2008년 3월 대사 이임 시 모스크바 외곽 푸틴 대통령 별장에서 푸틴을 만났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와 구별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는 것은 러시아의 안보에 대한 실존적 위협이라고 말하면서 모든 방안을 강구할 것이라고 했다. 번스 대사는 불길한 예감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그 후 상황은 번스가 예측한 대로 전개됐다. 2008년 8월 러시아는 조지아를 침공 점령했고 2014년에는 우크라이나 남단 크림반도를 병합한 데 이어 지난 2월에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그것이 푸틴의 러시아가 실제로 느낀 심각한 안보 위협 때문인지, 옛 소련 부활에 대한 푸틴의 시대착오적 망상인지는 평가가 다를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이 2024년 대선을 앞두고 유례없는 장기집권에 대한 명분을 만들기 위한 무리수일 수도 있다.

번스의 회고록에는 미국 미사일방어망의 유럽 배치와 관련된 이야기도 나온다. 2007년 당시 미국은 이란 미사일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폴란드와 체코에 미사일방어망 설치를 검토하고 있었다. 번스 대사는 이번에도 “성급하게 배치하지 말라!”(don’t rush to deploy!)며 신중하게 처리할 것을 본부에 강력히 건의했다. 그 후 미국은 2016년 폴란드와 루마니아에 탄도미사일 방어체계를 설치했다. 유럽에 대한 이란의 미사일 공격에 대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러시아는 나토와 러시아 간의 전략적 안정성을 파괴하는 조치로 보았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 방안과 관련한 러시아 측 제안에도 동유럽 배치 미국 미사일 철수가 들어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교훈

그동안 우리는 강대국들의 큰 어젠다를 잘 몰랐고 남의 일로 생각했다. 이제는 아니다. 이번의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고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첫째, 한반도의 외교·안보 이슈를 좀 더 큰 스케일의 국제정치적 안목에서 볼 때가 되었다. 제국에의 향수 같은 강대국의 아이덴티티 정치(identity politics), 스트롱맨 지도자들의 심리까지 관심을 갖고 분석해야 한다. 동맹·미사일방어 체계 등 그들의 거대 담론을 알고 우리 외교정책에 반영해야 한다. 세계 10위권 종합 국력의 한국은 이제 변방의 힘없는 나라가 아니다.

둘째, 동맹의 문제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다. 한·미 동맹이 우리 외교 안보의 초석이라는 데에 대해서는 국민적 합의가 있다. 이를 계속 유지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주국방론, 자강론의 의미도 더욱 새겨야 한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보듯이 이라크·아프카니스탄 전쟁에 직접 개입했다가 낭패를 본 미국은 이제 웬만한 국제 분쟁에는 직접 참전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해 보인다. 또 우리는 새로운 동맹 문제에 대해서도 냉철하게 접근해야 한다. 중국이 ‘인도태평양판 나토’로 간주하는 쿼드(Quad) 참여 문제도 신중해야 한다.

셋째, 미사일방어망 참여 문제다. 미국·러시아·중국은 모두 미사일방어망 문제에 있어 극도로 민감하다. 2001년 푸틴 대통령 방한 때 발표된 공동성명과 관련해서 반기문 당시 외교차관이 전격 경질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탄도탄 요격미사일(ABM) 협정 관련 내용에 대해 당시 미국 부시 행정부가 크게 반발한 것이 이유다.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 한국 배치 문제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2017년 5월 새 정부 특사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우리 대표단은 왕이 외교부장, 양제츠 국무위원, 시진핑 주석을 차례로 만났다. 사드 문제가 거의 대화의 전부였다. 특히 X밴드 레이더에 대해서는 극히  민감했다. 우리는 사드 배치가 북핵 미사일에 대한 대응이라고 강조했지만, 중국은 자국을 겨냥하는 미국의 미사일방어 체계가 한국에 설치된 것으로 생각했다. 러시아가 동유럽에 배치된 미사일방어망을 자국을 겨냥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외교·안보 전략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한국은 한때 제국을 유지했던 4강이라는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나라다. 우리가 좋든 싫든 강대국 국제정치, 패권정치의 속살을 알고 이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봉길 북한대학원대 석좌교수, 전 주인도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