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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모욕으로 힘을 얻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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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디렉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디렉터

대선은 3주 전에 끝났지만 이 문제는 짚고 넘어가고 싶다. 이번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진보 진영이 암묵적으로 기댔던 방식이 ‘모욕 캠페인’이다. 공식적으론 ‘내가 더 잘한다’는 포지티브 선거전과 철저한 검증을 내걸었지만 선거 전면에 툭툭 등장하며 유권자에게 크게 각인됐던 건 모욕 캠페인이다. 표심에 도움이 될 듯하면 인간적 모욕이나 모멸감을 가하는 것도 불사하는 마케팅이다.

이른바 ‘쥴리 벽화’가 서울 시내에 등장한 직후 민주당은 침묵했다. 벽화를 통해 말초적 호기심을 자극해 확인되지 않은 성 추문이 확대 재생산되기를 내심 기대하는 듯 조용했다. 민주당은 여론이 침묵을 문제 삼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 SNS에 “눈동자가 엄청 커졌다”며 이른바 ‘쥴리 얼평’에 뛰어들었던 여권 전 의원도 있다. 법무장관을 했던 분은 자신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 회초리를 때리는 합성 사진을 SNS에 올려놨다.

대선 기간 민주당의 득표 전략
상대방 창피 주며 분노 끌어내
국정 이끌 동력 잃는 것 아닌가
변하지 않는 진보는 희망 없어

위의 사례는 모두 집단이나 이념, 정책이 아닌 개인을 겨냥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또 주로 익명성에 기대 온라인 공간에서 자기들끼리 주고받던 일종의 짤이나 밈을 당당하게 공개된 영역으로 끌고 들어왔다는 점에서도 성격이 같다.

서소문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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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 캠페인을 그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정도의 일탈로 치부하기엔 그 깊이가 만만치 않다. 사회적 금기를 뛰어넘어 수모를 줘야지만 내 속이 풀릴 것 같다는 분노가 이면에 숨어 있다. 참지 못하니 분을 모욕과 조롱이라는 방식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욕 캠페인을 만드는 동력은 분노이고, 분노를 공개적으로 드러내 지지층을 결집하는 게 모욕주기의 효과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상대방 인정 거부→분노→분노 발산(모욕)→동조자들의 결집→상대방 더욱 거부’로 무한 반복할 수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인가. 민주당에도 작고한 김근태 전 의원처럼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면서도 상대를 향한 예의를 잃지 않는 정치인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 민주당에선 이런 분을 찾기 힘들다. 오히려 문재인 정부 5년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모욕과 분노를 함부로 드러내는 게 더욱 쉬워졌다. 지금 한국 사회는 ‘빨간 옷 사람’과 ‘파란 옷 사람’으로 첨예하게 갈려 있으니 모욕과 조롱을 놓고 적절성을 따지는 상식적 기준은 뒤로 밀리고 진영 간의 싸움이 되어 버린다. 모욕과 분노를 가라앉힐 사회적 저항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모욕주기의 더욱 깊은 함의는 민주당과 진보 진영이 나라를 하나로 이끌어갈 동력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국민 다수를 결집할 만한 포지티브 엔진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결국 모욕 캠페인과 분노 결집에 손을 벌린다. 과거 진보 세력은 군사독재 해체와 권위주의 탈피라는 목표를 내걸어 국민의 동의를 끌어내고 사회를 바꿨다. 군사 정부라는 외피는 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커진 한국 사회의 몸집을 더는 감당할 수 없었고, 이 모순을 해결한 게 민주화였다.

하지만 지금 민주당과 진보 진영의 비전은 무엇인가. 떠오르는 건 적폐청산과 반일 정도다. 탄핵으로 집권한 민주당 정권은 적폐청산으로 정권의 동력을 만들어왔고, 이번 대선 역시 탄핵과 적폐청산의 연장선에서 치르려 했으며, 이 와중에 불쑥불쑥 튀어나온 게 모욕 캠페인이었다.

지금 민주당과 진보 진영이 의지하고 있는 패러다임은 30여년 전과 별 차이가 없다. 군부독재 자리에 적폐가, 반미 자리에 반일이 대신했을 뿐이다. 30여년 전엔 한국 사회의 확장을 막는 외피를 깨는 동력이었지만, 그 단계를 오래전에 지난 지금 민주당과 진보 진영의 적폐청산 도그마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동원되는 만능의 논리가 됐을 뿐이다. 그러니 현재 한국의 청년 실업, 남북 관계, 미·중 외교 등에서 여전히 30여 년 전 그대로 이젠 몸에 안 맞는 옷을 해법으로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인국공 사태에서 보이듯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지금 노량진 학원가에서 묵묵하게 공시생 생활을 견디는 청년들이 공감할 해법이 전혀 아니다. 남북이 함께 어우러지는 감성 가득한 ‘우리민족끼리’를 그리지만 그러기엔 북한 ICBM이 하늘을 마구 날아다닌다. 중국의 국익과 대한민국의 국익 충돌이 점점 커지고 있는데 민주당과 진보 진영 어딘가에선 미국 혐오와 미국의 대안세력 중국이라는 희망을 여전히 갖고 산다.

10여년 전만 해도 보수가 바뀌어야 나라가 산다는 얘기가 계속됐다. 부패에 둔감한 보수, 과거로 회귀하려는 보수에 대한 경고였다. 그런데 이젠 진보가 뼛속까지 바뀌지 않으면 나라가 한계에 도달하는 시대가 됐다. 대한민국의 운이 여기까지인지, 아니면 계속될지가 민주당과 진보의 변화 여부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