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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덕환의 미래를 묻다

유해물질 따로 없어…종류보다 용량 주의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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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발색샴푸 논란으로 본 유해물질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소비자들이 열광했던 폴리페놀 발색 샴푸에 소량의 첨가제로 넣는 ‘1, 2, 4-트라이하드록시벤젠(THB)’의 유해성 논란이 점입가경이다. 법원은 식약처의 광고 금지를 정지시켜 버렸고, 총리실은 지난주 이례적으로 식약처의 THB 사용금지 조치를 재검토했다. 어느 쪽으로든 곧 결과가 나오겠지만, 퇴출 위기에 내몰린 제조사가 미국 시장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 본사와 제조공장의 이전까지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자칫하면 전통 염색약의 독성에 시달리는 소비자들이 우리 기업의 신제품을 인터넷 직구로 미국에서 구입하게 될 수도 있다. 뒤늦게 발색 샴푸를 출시하겠다고 부산을 떨고 있는 대기업들도 볼썽사납다. 오얏나무 아래에서는 갓끈도 고쳐 매지 말라고 했다.

설탕·소금도 지나치면 건강 해쳐
“천연물질이 안전하다”도 오해

화학물질 유해성은 과학의 영역
과도한 공포는 사회적 혼란 불러

허용치는 차량 제한속도와 비슷
정부는 합리적 규제안 제시해야

규제 따른 사회적 비용도 막대

똑같은 유해물질이라도 노출 경로에 따라 유해성이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특히 호흡을 통한 흡입을 경계해야 한다. 사진은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 진열돼 있는 생활화학제품. [뉴스1]

똑같은 유해물질이라도 노출 경로에 따라 유해성이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특히 호흡을 통한 흡입을 경계해야 한다. 사진은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 진열돼 있는 생활화학제품. [뉴스1]

과학적으로 확인된 화학물질의 유해성은 국가나 인종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유럽연합(EU)이 우려하는 THB의 피부 감작성이나 유전 독성은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걱정스러운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국가가 EU의 사용금지 조치를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EU와 달리 미국·영국·일본·캐나다·호주에서는 THB에 대한 어떠한 규제의 움직임도 찾아볼 수 없다. 화학물질의 유해성은 ‘과학’의 영역이지만, 규제는 고유한 ‘주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실 피부 감작성과 유전 독성이 우려된다는 EU 소비자안전과학위원회(SCCS)의 주장은 과학적으로 설득력이 충분하지 못하다. 사람에게 나타나는 부작용을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EU가 동물실험을 통해서 확인한 피부 감작성은 전통적인 염색약의 주성분인 암모니아나 과산화수소의 독성과는 비교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쥐티푸스균(살모넬라 티피무리움)을 이용하는 에임스 시험법으로 추정한 유전독성도 인체 발암성의 충분한 근거로 보기 어렵다.

유해물질 규제에 필요한 사회적 비용도 만만치 않다. 유해물질 규제는 정부가 금지 목록에 올리거나 허용기준을 설정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제조사는 새로운 원료·첨가제·공정을 개발해야 하고, 철저한 품질관리를 위한 기술·시설·인력도 갖춰야 한다. 정부도 시장을 감시하기 위한 종합적인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런 노력이 공짜일 수 없다. 결국 소비자는 자신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더 비싼 제품 가격과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해야만 한다. 모든 국가가 그런 능력과 의지를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술과 담배도 1급 발암물질

유해물질 규제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도 고려해야 한다. 술과 담배는 인체 발암성이 과학적으로 분명하게 확인된 ‘1군’ 발암물질이다. 육류·생선을 굽거나 훈제할 때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지는 벤조피렌도 역시 1군 발암물질이다. 그렇다고 모든 국가가 음주·흡연을 금지하고, 직화구이·훈제를 규제하지는 않는다. 과학적 근거보다 전통이나 종교를 더 중요하게 평가하는 소비자를 설득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사회 정의와 공정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THB를 원료로 사용하는 염색약을 사용하지 않는 EU에서는 THB의 사용을 마음대로 금지할 수 있다.

우리의 사정은 다르다. KAIST의 이해신 교수가 개발한 폴리페놀 발색 샴푸를 소비자들이 뜨겁게 반기고 있다는 현실을 확실하게 고려해야만 했다. 경기가 시작된 후에는 규칙을 바꾸지 않는 것이 공정한 원칙이다. 물론 어쩔 수 없이 규칙을 바꿔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는 근거를 제시해야만 한다. 식약처가 EU와 주고받았다는 전자우편은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다. 남이 장에 간다고 우리도 무작정 따라나서야만 한다는 식약처의 주장은 부끄러운 것이다. 자칫하면 식약처가 윤리성을 심각하게 의심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화학물질이 우리의 건강을 해칠 수 있는 것은 분명한 과학적 사실이다. 물리적 외상(外傷)에 의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질병은 화학적 이유에 의해서 발생한다. 몸속에서 유해물질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음식과 함께 섭취하거나, 호흡을 통해 흡입하거나, 피부를 통해 접촉하는 유해물질이 질병을 일으킬 수도 있다.

독성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중세의 파라셀수스는 ‘용량이 독을 만든다’고 했다. 세상에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유해물질’이나 ‘독’(毒)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의 생존에 꼭 필요한 산소나 소금도 지나치게 많이 흡입하거나 섭취하면 건강을 해친다. 심지어 설탕과 같은 탄수화물도 너무 많이 먹으면 중독 증상이 나타나서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유해물질의 ‘종류’보다 ‘용량’에 대한 관심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노출 경로에 따라 유해성 달라져

유해물질의 노출 경로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똑같은 유해물질이라도 노출 경로에 따라 나타나는 유해성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호흡을 통한 흡입을 특히 경계해야 한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멀쩡한 살균제 성분을 밀폐된 실내에 장시간 분무시켰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똑같은 살균제 성분을 물티슈에 사용하는 경우에는 크게 걱정할 이유가 없다.

인공적으로 합성한 물질은 모두 인체에 유해하고, 자연에 존재하는 ‘천연물’은 우리에게 안전하다는 주장은 믿을 것이 아니다. 숲속의 공기를 건강하고 상쾌하게 만들어준다는 ‘피톤치드’도 사실은 식물이 만들어내는 ‘식물성 살생(殺生) 물질’이다. 인공적으로 합성한 비타민C도 과일이나 야채에 들어있는 천연물과 화학적으로 똑같은 것이다. 단맛·신맛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불순물이 포함된 흑설탕이나 천연식초가 더 좋다는 주장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유해물질의 독성이나 부작용이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특정한 화학물질에 의해서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는 알레르기도 있다. 장기간에 걸친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노출에 의해서 독성이 나타나는 발암물질과 같은 만성 독성물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소량의 발암물질을 섭취·흡입했다고 당장 암에 걸린다고 겁을 낼 이유는 없다. 발암물질에 대한 지나친 걱정 때문에 오히려 더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게 될 수도 있다. ‘독(毒)을 잘 쓰면 약(藥)이 된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동양의 전통의학에서는 맹독성의 비소 화합물인 비상(砒霜)이나 꿀벌의 독인 봉독(蜂毒)을 약으로 사용했다. 오늘날 약국에서 판매하는 전문의약품도 너무 많이 복용하면 치명적인 부작용이 나타난다.

질병은 우리에게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유해물질의 과다 노출에 의한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은 절대 외면할 수 없다. 첨단 생리학과 화학을 기반으로 하는 독성학이 현대적 질병 예방의 핵심이다. 비현실적인 케모포비아(화학물질 혐오증)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화학물질의 특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현명하게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질병 예방을 위한 첨단 독성학

정부 차원에서 유해물질의 합리적인 규제에 더 많은 투자와 노력을 해야 한다. 유해물질의 유해성을 확인하기 위한 첨단 독성학과 분석법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유해물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소비자들에게 유해성만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정책은 의미가 없다.

유해물질의 ‘허용기준’은 공공도로를 운행하는 자동차에 요구되는 ‘제한속도’와 같은 것이다. 과속한다고 반드시 사고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제한속도를 지킨다고 절대 안전한 것도 아니다. 과속 운전자는 제한속도를 규정한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벌금을 내야 하는 것이다.

허용기준도 역시 시중에 생산·유통되는 제품이나 다중이용시설의 환경을 관리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이다. 허용기준을 지키지 않은 제품이나 다중이용시설이 확인됐다고 당장 소비자의 건강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업자나 관리자를 법률에 따라 처벌하면 된다. 허용기준을 안전기준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결국 개인의 건강은 스스로 노력으로 지켜내는 것이다. 유해성이 확인된 화학물질의 노출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과식과 편식을 피하고, 생활화학제품의 무분별한 사용도 줄여야 한다. 허용기준을 만족하는 제품이라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거나 자주 사용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식약처를 국민이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전문성과 윤리성을 강화하는 것이 그 출발이 될 수 있다. 식약처가 수행하는 연구개발 용역사업의 부작용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식약처는 유해물질의 합리적인 관리 업무에 올인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덕환

서울대에서 화학으로 학부를, 물리화학으로 석사를 마치고, 미국 코넬대에서 이론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린스턴대 연구원을 거쳐 1985년부터 서강대에서 화학을 가르치고 연구했다. 대한화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2019년 퇴임 후 탄소문화연구원장과 에너지 정책 합리화를 추구하는 교수협의회(에교협)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