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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이’다…흙으로 영원을 빚은 권진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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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기사, 1953, 안산암, 62.0x65.0x29.0㎝. 권경숙 기증,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기사, 1953, 안산암, 62.0x65.0x29.0㎝. 권경숙 기증,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권진규는 스스로를 ‘장이’라고 했다. ‘(나는) 조각가가 아니라 장인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자신이 지닌 ‘장인’의 손을 대견스럽게 바라보고 자랑스러워했던 사람이다.” 조각가 권진규(1922~73)의 조카이자 권진규기념사업회 이사장인 허경회 박사가 최근 펴낸 책 『권진규』(PKM북스)의 한 구절이다.

49년 전, 세상에 좌절하며 떠난 권진규가 이번엔 제대로 위로받게 됐다. 그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24일 개막했다. 유족과 권진규기념사업회의 작품 기증(총 141점)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여는 최대 규모 전시다. 1950년대 주요 작품부터 70년대 작품까지, 조각·회화·드로잉·아카이브 등 173점을 망라했다.

이번 전시작 중 하나인 방탄소년단 RM의 소장품. 1965년, 점토에 채색, 29x45x15㎝. [RM 인스타그램 캡처]

이번 전시작 중 하나인 방탄소년단 RM의 소장품. 1965년, 점토에 채색, 29x45x15㎝. [RM 인스타그램 캡처]

유족의 기증작 외에도 이건희 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 고려대박물관, 리움 등 기관 및 개인 소장 대여 작품들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그중엔 방탄소년단 RM의 소장품도 포함됐다. 고개를 숙인 말 조각으로 1965년쯤 작업한 것으로 추정된다. 개막 직후 RM이 전시장을 찾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20~30대 관람객 발길도 이어진다.

권진규는 이중섭(1916~56), 박수근(1914~65) 등과 함께 한국 근대 미술의 거장으로 꼽힌다. 1922년 함경남도 함흥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47년 이쾌대가 개설한 성북회화연구소에 들어가 미술을 배웠다. 49년 일본 도쿄의 명문 무사시노 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했고, 53년 졸업하던 해 일본 최고 공모전인 ‘니카전’에 석조 ‘기사’등 3점을 출품해 특대상을 받았다. 59년 귀국한 그는 서울 성북구 동선동에 아틀리에를 손수 설계해 짓고 작업하다가, 73년 5월 4일 51살 나이에 ‘인생은 공(空), 파멸’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보살입상, 1955, 배나무, 54.3x13.3x10.9㎝, 개인소장. [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보살입상, 1955, 배나무, 54.3x13.3x10.9㎝, 개인소장. [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전시는 작가의 불교적 세계관을 반영해 ▶입산(1947~58) ▶수행(59~68) ▶피안(69~73) 등 세 시기로 나눠 보여준다. 일본 시절 제작한 ‘마두’와 ‘기사’ ‘보살입상’ 등이 입산 시기, 귀국 후 작업한 ‘지원의 얼굴’ 등 다수의 여성 두상과 흉상이 수행 시기, ‘가사를 걸친 자소상’ ‘비구니’ ‘불상’이 피안 시기 작품으로 분류됐다.

전시장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목조 ‘입산’부터 강력하다. 사찰의 일주문 형식을 닮은 이 작품은 이상향에 대한 염원을 강렬하게 전한다. 인간과 말이 하나 된 기사(騎士)상은 니카전 수상작으로, 말갈기와 기사의 머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진 독특한 조형에 다섯 면 형상은 각기 다르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걸작이다. 권진규가 홍익대 강사 시절 제자를 모델로 제작한 다수의 흉상도 볼 수 있다. 대표작 ‘지원의 얼굴’(1967)은 단순하고 단정한 이목구비에 응축된 내면을 표현하는 데 매달렸던 작가의 노력을 보여준다.

선자, 1966, 테라코타, 37.9x21.2x47.5㎝, 개인소장. 이번 전시 제목 노‘실의 천사’는 ‘이틀리에의 작품’이라는 뜻이다. [사진 이정훈]

선자, 1966, 테라코타, 37.9x21.2x47.5㎝, 개인소장. 이번 전시 제목 노‘실의 천사’는 ‘이틀리에의 작품’이라는 뜻이다. [사진 이정훈]

후기로 갈수록 권진규는 작품에 정신성을 담아내는 일에 천착한다. 자기 자신을 승려로 형상화한 ‘가사를 걸친 자소상’, 삼베의 거친 질감을 살린 건칠 작업으로 예수의 고뇌를 형상화한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 나무로 깎아 만든 ‘불상’ 등이 그런 작품이다. 특히 ‘가사를 걸친 자소상’은 길게 뻗은 목, 맑은 두 눈, 보일 듯 말 듯 미소 짓는 모습이다. 사랑했던 여인 오기노 도모(1931~2014)를 일본에 두고 귀국했으나 여러 일이 무산돼 고통에 빠져 있던 시기에 완성한 작품이라 먹먹하게 와 닿는다.

한희진 학예연구사는 “권진규는 작품 대상이 동물이건 사람이건, 크건 작건, 특별한 위계를 두지 않고 일관되게 사물 너머 존재하는 본질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며 “자신만의 강건하고 응축된 형태를 통해 영원성을 구현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흔히 권진규를 리얼리즘 작가라 하지만, 그가 추구한 건 사실적인 것도, 아름다운 것도 아닌, 사라지지 않는 영혼, 즉 영원성이었다”고 덧붙였다.

삼공블록과 벽돌이 좌대로 등장한 전시공간도 독특하다. 이는 1965년 신문회관에서 1회 개인전을 열었을 때 권진규가 삼공블록과 벽돌을 이용해 자기 작업실의 우물과 가마를 형상화한 데서 착안했다고 한다. 백지숙 서울시립미술관장은 “권진규는 어떤 사조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확고하게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했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그의 작품에 내재한 동시대적 의미를 편견 없이 들여다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전시 연계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열린다. 4월 7일 전시 특별공연 ‘콰르텟 S 특 연주회: 권진규가 사랑한 클래식’, 9일 학술대회가 열린다. 전시 기간 중 ‘권진규 아틀리에’가 매주 토요일 개방되며, 매주 목, 토요일 오후 2시에는 유족이 진행하는 특별 도슨트 ‘나의 외삼촌, 권진규’가 진행된다. 전시는 5월 22일까지 서울, 7월 26일부터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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