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그는 흙으로 영혼을 빚고 싶었네....영원을 꿈꾼 조각가 권진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기사, 1953, 안산암,, 62.0x65.0x 29.0cm. 권경숙 기증,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 이정훈]

기사, 1953, 안산암,, 62.0x65.0x 29.0cm. 권경숙 기증,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 이정훈]

1955년 배나무로 깎아 만든 보살입상. 개인소장. 이정훈 촬영.[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

1955년 배나무로 깎아 만든 보살입상. 개인소장. 이정훈 촬영.[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

"권진규는 스스로를 '장이'라고 했다. '(나는) 조각가가 아니라 장인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자신이 지닌 '장인'의 손을 대견스럽게 바라보고 자랑스러워했던 사람이다." 

조각가 권진규(1922~1973)의 조카이자 권진규기념사업회 이사장인 허경회 박사가 최근에 펴낸 책『권진규』(PKM북스)에 쓴 글이다. 그에 따르면, 외삼촌 권진규의 손은 '성실한 손(참되고 진실한 손)'이었고. 무엇하나 허투루 하는 법 없이 '천착(穿鑿)하는 손'이었다. 사람들은 살아생전 미술계에서 냉대를 받고 스스로 삶을 마감한 권진규를 '비운(悲運)의 천재'라 부르지만, 그는 "'비운'의 라벨은 그의 삶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형용이다. 나는 그에게서 겨울 참나무의 나력(裸力·벌거벗은 힘)을 본다"고 썼다.

서울시립미술관, 회고전 개막 #탄생 100주년, 작품 기증 기념 #RM 소장품 '말'도 함께 선보여 #조각, 회화, 드로잉 등 총240점 #7월부터 광주시립미술관 전시

RM 소장품 포함 총 240점 

이번 전시작 중 하나인 방탄소년단 RM의 소장품.1965년, 점토에 채색, 29x45x15cm,[RM 인스타그램]

이번 전시작 중 하나인 방탄소년단 RM의 소장품.1965년, 점토에 채색, 29x45x15cm,[RM 인스타그램]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리는 권진규 회고전을 찾은 RM. [RM 인스타그램 캡처]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리는 권진규 회고전을 찾은 RM. [RM 인스타그램 캡처]

49년 전 세상에 좌절하며 떠난 권진규가 관람객과 이번엔 제대로 위로를 받게 됐다. 권진규의 작품세계를 조망하는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 노실의 천사'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24일 개막했다. 유족과 권진규기념사업회의 작품 기증(총 141점)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여는 최대 규모 전시다. 1950년대 주요 작품부터 1970년대 작품까지 조각, 회화, 드로잉, 아카이브 등 총 240여 점을 망라해 소개한다.

이번 전시엔 유족의 기증작과 더불어 이건희 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 고려대박물관, 리움 등 기관과 개인 소장자로부터 대여받은 작품들을 한자리서 보여준다. 이 중엔 방탄소년단 RM의 소장품도 포함돼 있어 화제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말 조각으로 권진규가 1965년쯤 작업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 전시 개막과 동시에 RM이 전시 장을 찾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20~30대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권진규는 이중섭(1916~1956), 박수근(1914~1965) 등과 함께 한국 근대 미술 거장으로 꼽힌다. 1922년 함경남도 함흥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47년 이쾌대가 개설한 성북회화연구소에 들어가 미술을 배웠다. 49년 일본 도쿄 명문 무사시노(武藏野)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했으며, 53년 졸업하던 해 일본 최고의 공모전 중 하나인 ‘니카전(二科展)'에서 석조 '기사'등 3점을 출품해 특대상을 받았다. 이후 59년 귀국한 그는 서울 동선동에 아틀리에를 손수 설계해 짓고 작업했으나 73년 5월 4일 쉰한 살 나이에 ‘인생은 공(空), 파멸’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이상향에 대한 염원 

권진규의 '입산', 1964~65년경. 사찰의 일주문을 닮았다. 이정훈 촬영. [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권진규의 '입산', 1964~65년경. 사찰의 일주문을 닮았다. 이정훈 촬영. [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전시는 작가의 불교적 세계관을 반영해 시기별로 입산(入山, 1947~1958), 수행(修行, 1959~1968), 피안(彼岸, 1969~1973) 등 세 섹션으로 나눠 보여준다. 일본 시절 제작한 '마두'와 '기사' '보살입상' 등이 입산 시기 작품이라면, 귀국 후 작업한 '지원의 얼굴' 등 다수의 여성 두상과 흉상이 수행 시기, '가사를 걸친 자소상' '비구니' '불상'이 피안 시기 작품으로 분류됐다.

전시장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목조 '입산'부터 강력하다. 사찰의 일주문 형식을 닮은 이 작품은 선으로 표현된 두 개의 기둥과 하나의 지붕으로 소박한 형상이지만, 이상향에 대한 강력한 염원을 강렬하게 전한다. 배나무를 깎아 만든 '보살입상'은 여래 부처의 머리와 보살의 몸을 결합한 단아한 모습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인간과 말이 하나 된 기사(騎士)상은 이번 전시에서 꼭 주목해야 할 작품 중 하나다. 니카전 수상작으로, 말갈기와 기사의 머리가 자연스럽게 하나로 이어진 독특한 조형에 다섯 면의 형상은 각기 다르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걸작으로 꼽힌다.

얼굴, 인간을 탐구하다  

지원의 얼굴, 1967, 테라코타, 50x32x2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정훈 촬영. [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

지원의 얼굴, 1967, 테라코타, 50x32x2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정훈 촬영. [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

가사를 걸친 자소상, 1969~70, 테라코타, 49x23x30cm. 고려대박물관 소장. 이정훈 촬영.

가사를 걸친 자소상, 1969~70, 테라코타, 49x23x30cm. 고려대박물관 소장. 이정훈 촬영.

불상, 1971, 나무 , 45x24x17.5cm,.개인소장, 이정훈 촬영. [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불상, 1971, 나무 , 45x24x17.5cm,.개인소장, 이정훈 촬영. [사진 권진규기념사업회]

권진규가 홍익대 강사로 근무하면서 알게 된 장지원, 최경자, 오형자 등 제자들을 모델로 제작한 다수의 흉상도 볼 수 있다. 대표작 '지원의 얼굴'(1967)처럼 단순하고 단정한 이목구비에 응축된 내면을 표현하는 데 집요하게 매달렸던 작가의 노력을 보여준다.

후기로 갈수록 권진규는 작품에 정신성을 깊이 있게 담아내는 일에 천착한다. 자기 자신을 승려로 형상화한 '가사를 걸친 자소상', 삼베의 거친 질감을 살린 건칠 작업으로 예수의 고뇌를 형상화한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 나무로 깎아만든 '불상' 등이 그런 작품이다. 특히 '가사를 걸친 자소상'은 길게 뻗은 목 , 맑은 두 눈, 보일 듯 말 듯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다. 사랑했던 여인 오기노 도모(1931~2014)을 일본에 두고 고국에 돌아왔으나 여러 일이 차례로 무산되며 고통에 빠져 있던 시기에 완성한 작품이라 더욱 먹먹하게 와 닿는다.

한희진 학예연구사는 "권진규는 작품의 대상이 동물이건 사람이건, 크건 작건 특별한 위계를 두지 않고 일관되게 눈에 보이는 사물 너머 존재하는 본질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며 "자신만의 강건하고 응축된 형태를 통해 영원성을 구현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흔히 권진규를 리얼리즘 작가라 하지만 그가 추구한 것은 사실적인 것도, 아름다운 것도 아닌, 절대 사라지지 않는 영혼, 즉 영원성이었다"고 덧붙였다.

삼공블록과 벽돌이 좌대로 등장한 전시공간도 독특하다. 이는 1965년 신문회관에서 개최한 1회 개인전을 열었을 때 작가가 삼공블록과 벽돌을 이용해 자기 작업실의 우물과 가마를 형상화한 데서 착안했다고 한다.

백지숙 서울시립미술관장은 "권진규는 어떤 사조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확고하게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했다"며 "이번 전시는 그의 작품에 내재한 동시대적 의미를 편견 없이 들여다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전시 연계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열린다. 4월 7일 전시 특별 공연 '콰르텟 S 특별 연주회 — 권진규가 사랑한 클래식', 9일 학술대회가 열린다. 전시 기간 중 서울 동선동에 위치한 ‘권진규 아틀리에’가 매주 토요일 개방되며 매주 목, 토 오후 2시에 유족이 진행하는 특별 도슨트 '나의 외삼촌, 권진규'가 진행된다. 전시는 5월 22일 서울 전시가 끝난 뒤 7월 26일부터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린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