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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대신 이불정리·비타민 먹기 도전…'갭이어'에 빠진 그들 [밀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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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라(24)씨는 직장을 잠시 쉬고 갭먼스'를 가지면서 겪을 일들을 블로그에 남겼다. 사진은 미술치료 수업을 들었을 때 찍은 것. [김아라씨 블로그]

김아라(24)씨는 직장을 잠시 쉬고 갭먼스'를 가지면서 겪을 일들을 블로그에 남겼다. 사진은 미술치료 수업을 들었을 때 찍은 것. [김아라씨 블로그]

아침 9시 반쯤 일어나 에그인헬을 먹고 공원 한 바퀴를 돌았다. 집에 들어와 씻고 바나나 한 개를 먹고 커피를 마신 뒤 수업을 들으러 나섰다. 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미술치료 수업이다. 5시간 수업이나 살짝 겁먹었는데 생각보다 힘들진 않다. 선생님은 식물을 채색할 때 초록색 말고 다른 색을 고르는 안목이 있다며 나를 칭찬해줬다. 자격증 준비를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못 할 게 뭐 있을까! (김아라씨의 일기 중)

7년차 직장인이던 김아라(24)씨는 지난해 한 달간 회사에 휴직 신청을 내고 '갭먼스'를 가졌습니다. 오랜 기간 쉼없이 회사 생활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조금씩 망가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허리 통증까지 점점 심해지니 결심이 섰습니다. 그렇게 생긴 한 달의 시간. 아라씨는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며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밀실]<제87화> #갭이어를 보내는 MZ

최근 MZ세대 사이에서는 아라씨처럼 학업이나 일을 중단하고 자아를 찾는 시간을 갖는 '갭이어' 문화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본래 '갭이어'는 서구 사회에서 대학교에 진학하기 전, 청소년들이 1년 간 학업을 중단하고 자신의 적성을 찾는 시기를 뜻하는데,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갭이어'가 젊은 세대 사이에서 유행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영향으로 대학생활도, 직장 생활도 여러 제약이 생기면서 '자유로운 시간'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문 닫은 학교...나를 찾아 떠난 '갭이어'

교육대학교에 재학 중인 박상민(23)씨 역시 코로나를 계기로 휴학을 하고 캐나다에서 갭이어를 보내고 있습니다. 상민씨는 "코로나 때문에 2년이라는 대학 생활이 삭제됐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사회에 나가기 전에 내가 하고 싶었던 경험을 후회 없이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갭이어를 결정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어학연수를 하면서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상민 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가는 요즘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캐나다에서 갭이어를 보내고 있는 박상민(23)씨 [박상민 제공]

캐나다에서 갭이어를 보내고 있는 박상민(23)씨 [박상민 제공]

상민씨는 캐나다 어학연수가 끝나면 덴마크로 넘어가 '폴케호이스콜레(자유학교)'를 체험할 예정입니다. 폴케호이스콜레는 시험이나 경쟁이 없고 학생들이 듣고 싶은 교과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운영하는 덴마크의 독특한 교육과정입니다.

상민씨는 입시 위주의 삭막한 한국 교육을 조금이라도 보완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습니다.

한국 사회는 어릴 때부터 좋은 성적을 받아 명문대에 가라고 강요하는데, 사실 모든 사람이 공부를 잘할 수는 없잖아요. 각자 잘 하는 게 다 다르니까요. 한 사람 한 사람이 꿈을 펼칠 수 있는 교육 환경이 됐으면 좋겠어요. 당장은 힘들겠지만 한국 청소년들도 서구 사회 청소년들처럼 진로 고민이 생길 때 자연스럽게 '갭이어'를 쓸 수 있는 문화가 되기를 바랍니다.

코로나로 해외 취업 막혀... 나만의 '100일 챌린지'  

100일 요가 챌린지에 도전 중인 한정아(27)씨. [유튜브 캡처]

100일 요가 챌린지에 도전 중인 한정아(27)씨. [유튜브 캡처]

프리랜서 기획자인 한정아(27)씨도 2020년 코로나 확산으로 해외 입사가 어려워지면서 우연히 갭이어의 시간을 갖게 됐습니다. '안 해본 것들에 도전 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100일간 요가하기, 100일간 매일 블로그 글쓰기, 플라워 디렉팅 등 평소 해보지 않았던 일들에 도전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저랑 적성이 잘 맞고 재미있게 수업을 들어서 다른 쪽으로도 내가 일을 해볼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희망을 얻었어요. 매일 알던 것만 반복하는 '갇혀있는 세상'에서 새로운 것을 공부하고 배우니까 세상이 더 넓어지는 경험을 한 것 같아요.

‘나는 누구 일까’ 늦게 온 사춘기 풀어줘  

역시 7년차 직장인인 교사 김밝은(32)씨도 잠시 본업을 쉬면서 글쓰기와 영상만들기 등 평소 하고 싶었던 활동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밝은씨는 "사실 한국에서는 중학생 때부터 입시 위주 교육을 하면서 '나자신'에 대한 탐구를 할 기회가 별로 없다"면서 "갭이어를 하는 분들이 더 많아져서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도 괜찮다는 걸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습니다.

한국 사회도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의 행복과 비교하기보다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갭이어를 가질까 말까 고민하는 분들이라면 목표와 계획을 잘 세우셔서 쉼과 전체적인 나의 목적 틀이 잘 세워진다는 가정하에 추천드려요 

갭이어 한켠엔 ‘무거운 마음’... 현실 도피처 아니야  

‘갭이어’를 보내는 중인 MZ세대 역시도 갭이어가 결코 현실의 도피처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임용고시를 준비 중인 박상민씨 역시 갭이어를 택할 때 마냥 설레지만은 않았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 임용고시 공부를 하고 있어야 돼요. 대학 동기들은 오늘도 하루 종일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해요. 교사가 되고 싶은데 막상 갭이어를 보내면 교사라는 목표와 멀어질까봐 걱정이 됐죠.

그러나 불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갭이어를 보내는 하루하루가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합니다.

갭이어를 통해 제 인생을 새로 설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어요. 아직은 교사가 되고 싶지만 제가 여기서 새로운 가치나 꿈을 찾을 수 있다면 교사가 아닌 다른 꿈을 새롭게 꿀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한정아씨도 갭이어가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지름길일 수 있다"는 생각을 밝혔습니다. 김밝은씨는 갭이어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끝으로 다음과 같은 조언을 남겼습니다.

우선은 ‘쉬어도 괜찮다’는 마음가짐을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7년간 일만 하다가 막상 쉬려고 하니 ‘쉬어도 될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쉬어도 괜찮아요. 나를 위해서 가지는 시간을 가져도 괜찮다는 마음가짐을 가지시길 추천드려요. 두 번째는 꼭 자신의 루틴을 만들어라 하루 동안의 일정을 꼭 규칙적인 생활을 위해서 만들어라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규칙이 없으면 아침에도 늦게 일어나고 생활이 흐트러져요. 규칙적인 습관을 잡아두고 생활하면 갭이어를 좀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거예요.

밀실은 '중앙일보 레니얼 험실'의 줄임말로 중앙일보의 20대 기자들이 도있는 착취재를 하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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