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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전차, 맥없이 부서지거나 불탔다...지상전 왕자의 운명은[이철재의 밀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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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퉁 판처(Achtung - Panzer!)』

1942년 독일 육군 제24 기갑사단의 전차와 장갑차가 우크라이나 평원에서 전진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42년 독일 육군 제24 기갑사단의 전차와 장갑차가 우크라이나 평원에서 전진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37년 독일의 장교인 하인즈 구데리안이 펴낸 책이다. 우리말로 ‘전차를 주의하라’ 또는 ‘전차에 주목하라’는 뜻이다. 구데리안은 전차가 차량 탑승 보병과 전투기의 도움을 받아 적진을 돌파하는 전쟁을 그렸다.

그러나 책에 나온 전차의 미래상은 당시 현실과 거리가 멀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차의 활약상이 인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16년 9월 15일(이하 현지시간) 플레르-쿠르슬레트 전투에서 처음 등장한 영국군의 전차는 참호전에서 진로를 열어줄 신무기로 기대를 모았다. 독일군은 기관총을 튕겨내는 전차에 놀라 도망갔다.

그러나 낮은 성능과 잔 고장에 스스로 멈춰선 전차가 태반이다. 독일군은 포병의 화력으로 전차를 파괴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대전차 소총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전차엔 ‘철로 만든 관’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구데리안의 책 출간 2년 후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전차 중심의 기계화 부대를 앞세워 서유럽을 휩쓸었다. 전차는 20세기 지상전을 지배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 북쪽 브로바리 도로에 파괴된 채 버려진 러시아군 전차들. AP=연합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 북쪽 브로바리 도로에 파괴된 채 버려진 러시아군 전차들. AP=연합

하지만…. 21세기엔 전차가 필요 없다는 주장이 불거지고 있다. 지난달 24일 러시아가 시작한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이 계기다.

불타는 러시아 전차 사진으로 도배된 인터넷

러시아가 사흘 만에 석권한다는 당초 예상과 달리 한 달 넘도록 우크라이나가 끈질기게 저항을 이어가고 있다. 러시아군의 고전과 우크라이나군의 분전을 잘 보여주는 게 각종 소셜미디어(SNS)를 도배한 전쟁터 사진들이다. 상당수가 러시아군의 전차가 부서지거나 불타는 것들이었다.

우크라이나군이 파괴한 러시아군 전차에서 연기가 오르고 있다. AFP=연합

우크라이나군이 파괴한 러시아군 전차에서 연기가 오르고 있다. AFP=연합

26일 현재 군사 전문 사이트인 오릭스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296대의 전차를 잃었다. 126대가 파괴됐고, 4대가 손상됐다. 41대는 버려졌고, 125대는 우크라이나군이 노획했다. 그 가운데 17대의 최신 T-90가 러시아군으로선 특히 뼈아팠을 것이다. 반면 우크라이나군의 전차 피해는 모두 77대였다.

러시아군 전차의 천적은 서방의 대전차 무기다. 미국ㆍ영국ㆍ독일 등 나토(NATOㆍ북대서양조약기구) 국가를 중심으로 1만발 이상의 대전차 미사일과 대전차 로켓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했다. 특히 미국제 대전차 미사일 FGM-148 재블린과 영국제 대전차 미사일 NLAW가 유명하다. 재블린과 NLAW는 전차에서 가장 장갑이 얇은 상부를 노린다. 러시아군은 전차 상부에 슬랫아머(철창형 장갑)를 치거나 나무를 싣고 다녔지만 큰 효과가 없었다.

우크라이나가 터키로부터 사들인 드론(UAV)인 바이락타르 TB2도 러시아군 전차 사냥을 돕고 있다. 영국의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드론과 미사일 기술이 발전하면서 전차는 너무 비싸고 거추장스러워져서 가치가 없어지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전차가 전쟁터에서 우위를 잃어가고 있는 조짐은 2020년 아르메니아ㆍ아제르바이잔 무력 분쟁에서 이미 나타났다. 아제르바이잔은 터키제 바이락타르 TB2로 아르메이나군 전차와 보병전투차량을 잇따라 타격했다.

미국 해병대는 지난해 5월 마지막 전차대대를 해체했다. 2020년 전차 병과를 없애기로 한 결정에 따른 조처다. 미 해병대가 남ㆍ동중국해에서 중국과 싸우려면 작고 빠른 부대로 바꿔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군사 전문가인 니컬러스 드러먼드는 “전차가 전함의 순간을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전함은 해상전의 왕자였다. 그러나 항공모함에 밀려 전함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사라졌다. 공룡처럼 말이다.

전차가 '전함의 길'을 걷지 않을 듯

전차의 운명은 끝난 것일까. 다시 생각해보자는 의견이 많다. 러시아군 전차의 고난은 러시아군이 전차를 잘못 운용했기 때문이지 전차 효용성이 낮아졌기 때문은 아니라는 뜻이다.

우크라이나군 병사가 미국제 대전차 미사이린 재블린을 운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

우크라이나군 병사가 미국제 대전차 미사이린 재블린을 운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

러시아군은 전차가 따로 놀았다. 방종관 한국국방연구원 객원연구원(예비역 육군 소장)은 “미군은 항공여단의 헬기가 공중에서 엄호하면서 기갑부대가 전진한다”며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군은 제병협동작전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고 설명했다. 러시아군의 공격 헬기는 우크라이나군의 방공망에 걸려 맥을 못 추고 있다. 러시아군의 포병은 우크라이나군의 대(對)포병 사격에 된통 당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이동 경로를 도로만 고집해 우크라이나군의 매복에 쉽게 걸렸다. 우크라이나군을 무시해 정찰을 소홀히 했다.

제병합동작전 전문가인 마이크 제이슨 퇴역 미 육군 대령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무력 분쟁을 놓고 “우리는 훈련이 부족하고, 지휘가 엉망인 옛 공산권 군대를 보고 (전차가 필요 없다는) 잘못된 결론을 도출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러시아군의 사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박찬준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위원은 “러시아군의 최신 전차는 T-90은 아레나라는 최신 능동방어체계가 있는데도 피해가 크다”며 러시아판 방산비리를 의심했다. 아레나를 단 T-90이 소수이며, 이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보유하고 있는 엄청난 수의 대전차 무기는 ‘서방’이라는 특수한 변수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논리도 있다. 직접 개입을 할 수 없는 제약 때문에 미국 등 서방은 우크라이나에 간접적으로 대전차 무기를 보내주고 있다.

1만발 이상은 ‘천조국’이라는 미국도 감당하기 힘든 물량이다. 다른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처럼 대전차 무기를 쏘기는 어려울 듯하다.

두 번의 생존 위기를 극복한 전차

‘전차 무용론’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전차의 역사에서 큰 위기를 맞은 적이 여러 번 있다.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군 대전차 미사일인 AT-4 새거팀이 진지에서 발사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미사일은 사수가 목표물을 계속 보면서 유도를 해야 했다. Weapons & Warfare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군 대전차 미사일인 AT-4 새거팀이 진지에서 발사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미사일은 사수가 목표물을 계속 보면서 유도를 해야 했다. Weapons & Warfare

첫 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바로 찾아왔다. 핵폭탄 한 방이면 모든 게 다 끝나는데 전차가 무슨 소용이 있냐는 논리였다. 그러나 핵전쟁은 지구멸망을 각오하지 않는 한 일어날 수 없었다. 재래식 전쟁은 툭하면 벌어졌다. 전차는 다시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또 한 번은 이스라엘과 이집트ㆍ시리아 등이 맞붙은 제4차 중동전쟁(1973년 10월 6~25일)이었다. 유대교의 종교 기념일인 욤 키푸르(속죄일)에 일어났다고 해서 ‘욤 키푸르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앞서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ㆍ1967년 6월 5~10일)에서 전차와 전투기를 내세운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에 대승을 거뒀다. 절치부심한 아랍 국가는 이스라엘의 전차와 전투기에 맞설 묘책을 생각했다. 이스라엘군 전투기는 소련제 자주 대공포인 ZSU-23-4 쉴카와 지대공 미사일인 2K12 KUB로 요격했다.

그리고 이스라엘군 전차는 역시 소련제 대전차 로켓인 RPG-7과 대전차 미사일인 AT-3 새거로 상대했다. 이집트군은 참호를 파고 진지를 만든 뒤 RPG-7과 AT-3의 대전차 방어망을 쌓았다.

덤벼든 이스라엘군 전차는 불벼락을 맞았다. 개전 후 이틀간 시나이 전선에서 이스라엘군은 전차(290여 대)의 40%를 잃었다. 전차병 전사자는 1450명이었다. 2500~2800명으로 추정되는 전체 이스라엘군 전사자 중 절반 가까운 수치다.

이스라엘군은 나중에 예비군을 동원하고 예비 전차를 꺼내며, 미국으로부터 신형 전차를 인수하고, 부서진 전차를 다시 수리하는 등 갖은 노력으로 전선의 구멍을 메울 수 있었다.

전후 이스라엘군은 고전한 이유를 철저하게 분석한다. 전차가 보병 없이 단독으로 공격하는 기존 전술을 당장 폐기했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군이 이스라엘군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는 셈이다.

또 전차의 방어력을 높였고, 적 보병을 공격하는 박격포를 따로 달았다. 포병에 대한 투자도 늘렸다. 적의 대전차 방어망을 뚫는 데 포격이 최고이기 때문이었다.

"전차를 대체할 무기는 당장 나오긴 힘들어"

1970년대 이후 대전차 무기로 기울어진 추는 다시 전차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반응장갑과 복합장갑이라는 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이스라엘 방산회사인 라파엘이 개발한 전차용 능동방어체계 트로피가 날아오는 적탄을 요격하는 장면. Army Recognition 유튜브 계정 캡처

이스라엘 방산회사인 라파엘이 개발한 전차용 능동방어체계 트로피가 날아오는 적탄을 요격하는 장면. Army Recognition 유튜브 계정 캡처

반응장갑(Reactive Armor)은 블럭 모양의 껍데기 안에 둔감 화약(폭발 반응장갑)이나 고무ㆍ섬유강화플라스틱(비활성 반응장갑)을 채워 넣었다. 폭발 반응장갑은 포탄이나 미사일이 닿으면 터져 운동에너지를 줄여주거나 방향을 틀게 한다. 비폭발성 반응장갑은 포탄ㆍ미사일이 뚫고 지나가면 높은 압력이 생기면서 운동을 방해한다.

복합장갑(Composite Armor)은 세라믹으로 만든 패널 사이에 플라스틱 수지와 금속판을 끼워 넣는 방식의 장갑이다. 최근 소재 기술의 발전으로 복합장갑은 더 가벼워지면서도 더 튼튼해지는 추세다.

요즘 전차는 능동방호체계(APS)가 새 화두다. 능동방호체계는 대전차 무기를 재머(전파방해장치)나 복합 연막탄으로 교란해 빗나가도록 하는 소프트킬과 대응탄을 쏴 대전차 무기를 직접 파괴하는 하드킬 등 2가지 방식이 있다.

외부 카메라를 통해 전차 내부에서 기관총을 조준하는 원격사격통제체계(RCWS), 아ㆍ적군의 위치 등 전장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전장관리체계(BMS)도 전차의 방어력에 도움이 된다. 더 나아가 전차는 자동화로 승무원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고, 나중엔 로봇이나 무인차량(UGV)으로 바뀔 전망이다.

박찬준 위원은 “전차와 대전차 무기의 관계는 창과 방패의 싸움과 같다”며 “전차의 방어력이 높아지면, 대전차 무기의 공격력을 키우는 노력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한화디펜스의 지능형 다목적무인차량. 지난해부터 육군이 시범운용을 하고 있다. 이 기술이 발전하면 앞으로 무인 전차, 로봇 전차가 나올 것이다. 한화디펜스

한화디펜스의 지능형 다목적무인차량. 지난해부터 육군이 시범운용을 하고 있다. 이 기술이 발전하면 앞으로 무인 전차, 로봇 전차가 나올 것이다. 한화디펜스

예단은 섣부르다. 그러나 전차가 지금은 수세에 몰렸지만, 곧 예전의 자리를 되찾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여러 번 그러했듯이 말이다.

밀담

방종관 객원연구원은 “전차는 공격력ㆍ방어력ㆍ기동력을 고루 갖췄다”며 “전차를 대체할 지상전 무기는 당장 나오기 힘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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