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간부 부족하다” 덩샤오핑, 과학기술 인재 양성 힘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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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호 33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21〉

중국 개방 후 1949년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쫓겨났던 코카콜라가 다시 중국에 들어왔다.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몰라 다들 사 마시기를 주저했다. 첫해에 전국에서 25병을 팔았다. [사진 김명호]

중국 개방 후 1949년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쫓겨났던 코카콜라가 다시 중국에 들어왔다.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몰라 다들 사 마시기를 주저했다. 첫해에 전국에서 25병을 팔았다. [사진 김명호]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움츠리고 있던 1세대 혁명가들이 기지개를 켰다. 4인방을 끌어내리고 연금상태였던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에게 붉은 태양을 통째로 안겨줬다. 중국은 당이 지배하는 나라였다. 당장(黨章)에 몇 자를 추가했다. “덩샤오핑 동지의 지도를 받는다.” 덩은 부총리에 만족했다. 공식직함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국의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였다.

덩 “측근·옛 친구들과 인연 제쳐놔라”

미·중 수교 후 중국 전역에 디스코가 유행했다. 1980년 광저우(廣州). [사진 김명호]

미·중 수교 후 중국 전역에 디스코가 유행했다. 1980년 광저우(廣州). [사진 김명호]

덩샤오핑은 개혁과 개방을 선포했다. 미국과 수교를 앞두고 고급 간부들에게 과기(科技)분야 후계자 양성을 강조했다. “지식을 존중하고 인재를 존중해라. 무슨 일이건 제대로 하려면 사람이 있어야 한다. 4인방 몰락 후 옛 동지들이 제자리에 돌아온 것은 바람직하다. 문제는 연령이다. 경험은 풍부해도 체력이 예전만 못하다. 하루에 8시간 근무하기에는 문제가 많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젊은 간부들이다. 30대 전후의 간부들이 부족하다. 나는 현재의 20대 청년들이 우리가 젊었을 때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늙은것들이 다시 기어 나왔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면 후임자 양성과 발탁에 진력해라. 측근이나 옛 친구들과의 인연은 제쳐놔라. 인재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이 일에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의 개혁과 현대화 작업은 공염불이다.”

미·중 수교 3주 후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은 워싱턴, 애틀랜타, 휴스턴, 시애틀 4개 도시를 순방했다.  9일간 정계인사 외에 기업인과 금융계 인물들 만나며 중국 바람을 일으켰다. 1979년 1월 29일, 백악관에서 열린 환영식과 국빈만찬은 미국 역사상 최대규모였다. 회담에 앞서 카터가 30년 전을 회상했다. “1949년 4월, 공산당 부대가 칭다오(靑島)를 포위했을 때 나는 칭다오 앞바다의 잠수함에 있었다. 중공 승리 6개월 전이었다. 당시 부총리는 어느 부대를 지휘했습니까? 어쩌면 그때 봤을지도 모릅니다.” 덩도 지난날을 생각하며 웃었다. “1949년 4월 22일, 나는 장강(揚子江) 도강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전선이 500㎞였다.” 옆에 있던 브레진스키가 끼어들었다. “현재 부총리는 우리 대통령의 손님이다. 30년 전, 칭다오에서 만났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카터가 “이랬을 거라”며 손을 내밀자 덩도 “맞다”고 악수를 했다.

할리우드도 동작이 빨랐다. 베이징에 등장한 월트디즈니의 미키마우스와 도날드덕. [사진 김명호]

할리우드도 동작이 빨랐다. 베이징에 등장한 월트디즈니의 미키마우스와 도날드덕. [사진 김명호]

카터가 주관한 국빈만찬은 각료 전원과 상·하 의원 외에 각계를 대표하는 150명이 참석했다. 75세의 노부인이 덩샤오핑에게 다가왔다. 덩도 헬렌 포스터(아리랑의 저자 님 웨일즈)를 한눈에 알아봤다. 포스터는 1938년 남편 에드거 스노의 옌안(延安) 방문 1년 후, 옌안에 와서 덩을 만난 적이 있었다. 41년 전, 덩에게 써놓고 보내지 못했던 편지를 전달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두 사람은 해도 해도 끝이 없을 얘기를 장시간 나눴다. 덩은 여배우 셔리 맥레인의 팬이었다. 맥레인은 진보적인 배우였다. 덩에게 중국 농촌에서 감동한 얘기를 털어놨다. “들판에서 감 재배하는 교수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대학을 떠나 편벽한 지역에서 농사짓는 이유를 물었다. 교수는 농민들과 함께 하는 것이 즐겁다고 했다. 농민들에게 배우는 것이 많다는 말에 감동했다.” 듣기를 마친 덩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그런 교수는 당장 대학에서 축출시켜야 한다.” 놀란 표정 짓는 맥레인에게 카터가 입을 열었다. “부총리 말이 맞다. 강단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것이 교수의 의무다. 조언이라면 몰라도 정치학자가 정계에 진출하고, 경제학자가 관계에 나가면 국정을 엉망으로 만든다”며 덩을 쳐다봤다. 덩이 함박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맥레인도 덩의 한마디가 무슨 말인지 공감했다. 문혁시절 100만명의 지식인들이 농촌에 가서 재교육을 받았다. 우수 인력의 낭비였다. 고통받은 지식인들은 건강을 해치고 목숨도 부지하기 힘들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행운아였다. 덩은 좌풍을 혐오한 지도자였다. “모두가 공평하게 빈곤에 허덕이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다. 진정한 사회주의의 목표는 모두가 잘사는 것이다. 다들 잘살려면 서구의 과학과 선진기술을 도입해야 한다. 서구자본의 유입도 주저할 이유가 없다.”

덩, 보안요원 만류에도 킹 묘지 참배

미국의 석유 황제 해머는 세 차례 중국을 방문, 거액을 투자했다. 올 때마다 덩샤오핑의 환대를 받았다. [사진 김명호]

미국의 석유 황제 해머는 세 차례 중국을 방문, 거액을 투자했다. 올 때마다 덩샤오핑의 환대를 받았다. [사진 김명호]

블레어하우스에서 템플대학의 명예법학박사 학위 수여식이 열렸다. 덩의 수락 연설이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을 도배했다. “나는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사회가 내 학교였다.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의 신봉자에게 학위를 준 미국인의 개방적인 사고에 경의를 표한다. 미국 국민이 중국 인민에게 준 박사학위로 알겠다.”

1월 30일 오전, 덩샤오핑은 카터와의 세 번째 회담에서 양국의 정치, 과기, 경제, 문화 교류와 유학생 파견 등 12개 합의서에 서명했다. 카터의 환대는 극진할 정도였다. 2월 1일, 워싱턴 방문을 마친 덩은 미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애틀랜타로 갔다. 애틀랜타는 카터와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고향이었다. 시장이 계획에 없던 킹의 묘지 참배를 건의했다. 덩은 중국 측 보안요원들의 만류를 한 귀로 흘렸다. “킹 목사는 몽상가였다. 나도 몽상가다. 킹의 말처럼 I have a Dream, 내게도 중국의 공업화와 현대화를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킹 목사의 부친과 부인도 만나고 싶다.”

휴스턴으로 이동한 덩샤오핑은 기업인 1500명이 참석한 환영오찬에서 옥시덴탈 석유회사 회장 알몬드 해머를 만났다. 해머는 불청객이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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