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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엔 카센터 밤엔 포장마차, 유연한 공간 활용 필요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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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호 30면

POLITE SOCIETY

교회 건물을 리모델링한 스웨덴 예테보리의 수산시장. [사진 박진배]

교회 건물을 리모델링한 스웨덴 예테보리의 수산시장. [사진 박진배]

인류는 공간과 교류하며 역사를 만들어왔다. 그러면서 건축, 조경, 환경 디자인의 전문분야가 생기고, 거기에 공학과 기술이 뒷받침됐다. 세상에 지어지는 많은 건물들의 수명은 인간보다 훨씬 길다. 그러면서 원래 지어진 용도와 별개로 새로운 기능이 요구되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이미 지어진 건축물들을 다른 방법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고민된다. 흔히 리모델링, 리노베이션 등으로 불리는 영역은 건축의 역사만큼 오래, 우리와 함께 해왔다.

일상에서 우리가 소유, 상주하는 면적은 제한돼 있다. 그래서 집과 직장 말고 타인들과 편하게 어울릴 수 있는 공원, 카페, 백화점, 공연장 등과 같은 ‘제3의 장소’가 필요하게 됐다. 근래에는 더욱 색다르고 구체적이며 트렌드를 반영하는 장소들의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흔히 ‘요즈음 뜨는 동네’라는 표현은 유행에 민감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늘 이슈였다. 런던의 소호나, 파리의 리브고쉬(Rive Gauche), 뉴욕의 브루클린, 서울의 성수동 등은 한 번씩 이런 타이틀을 지녔던 동네다. 많은 경우 전통적으로는 낙후되거나 관심 밖의 지역이었다. 하지만 과거에 성(盛)하다가 버려진 건물들을 재활용하는 과정에서 지역의 역사성을 지키고 문화를 입히는 작업을 병행, 재생에 성공했다.

병기고가 공연장, 맥주공장이 호텔로

빈 오피스 공간을 활용한 ‘매드해터’ 파티 모습. [사진 박진배]

빈 오피스 공간을 활용한 ‘매드해터’ 파티 모습. [사진 박진배]

건물의 용도가 변경되면서 다른 공간이 태어나는 경우는 수두룩하다. 그 이유도 다양하다. 공장이나 창고, 폐교들이 미술관이나 공연장, 서점으로, 또 호텔이나 상점, 레스토랑 등으로 변경되는 예들이 대표적이다. 19세기 말에 지어진 병기고(兵器庫)가 공연장으로, 장난감 공장이 마켓으로, 전당포가 레스토랑으로, 맥주공간이 호텔로, 교회가 수산시장으로 변경되는 경우도 있다.

건물 전체의 리모델링이 여의치 않은 경우, 외관만 보존하거나 변경하는 사례들도 있다. 인디애나폴리스는 시의 중심가를 재개발하면서 기존 건물의 정면(파사드, facade)만 남겨놓고 뒷부분을 철거, 새로운 건축을 후면에 부착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비엔나에는 미관을 해치는 오래된 공장 건물의 껍데기만 새 단장한 프로젝트도 있다.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훈데르트 바세(Friedrich Hundertwasser)의 디자인이다. 이런 시도들은 도시의 경관을 보존하면서 역사성을 살리고, 새로운 수요도 충족시키기 위한 신중한 접근 방법들이다.

공장을 리모델링한 매사추세츠 현대미술관. [사진 박진배]

공장을 리모델링한 매사추세츠 현대미술관. [사진 박진배]

요즈음 이슈는 아무래도 오피스 공간이다. 코로나 이후에 하이브리드의 근무형태가 기존의 재택근무와 병행하며 자리를 잡았다. 자연스럽게 오피스의 많은 면적이 비게 됐다. 구글, 애플 등의 앞서가는 회사들은 이미 이렇게 남는 공간을 레스토랑이나 라운지, 체육시설, 도서관 등 직원들을 위한 편의 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일반 건물주의 입장에서는 큰 면적을 임대해서 사용하던 회사가 이사를 가면서 공실이 생기면 빠른 시간 내에 새로운 임대인을 찾기가 쉽지 않다. 특히 최근에는 비어 있는 공간들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임대 경쟁도 치열하다. 이런 틈새를 이용해서 빈 공간을 순회 전시로 활용하는 방안들도 생기고 있다. 근래 인기가 높았던 반 고흐, 컬러 팩토리(Color Factory), 루이비통, 다운튼 애비(Downton Abbey) 전시들 모두 빈 오피스를 이용했다. 기존의 미술관이나 디자인센터 공간은 숫자가 한정되어 있고 임대도 쉽지 않으며, 건축이 너무 강렬해서 오히려 전시의 콘텐트가 위축되는 경우도 많다. 텅 빈 공간은 일정기간 전시의 특성에 맞게 구체적으로 연출해서 사용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주말에 비는 오피스 공간의 일부를 파티 등의 이벤트로 대여해 주는 경우도 있다.

과거 맥주공장이었던 밀워키의 브루하우스 호텔. [사진 박진배]

과거 맥주공장이었던 밀워키의 브루하우스 호텔. [사진 박진배]

스토리가 첨가될 때 공간은 더 특별하게 부활한다. 인간만 스토리를 갖는 게 아니라 공간도 스토리를 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뉴욕의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 공연이다. “1930년대 말 경제공항이 끝나갈 무렵 뉴욕의 첼시지역에 초호화 호텔을 짓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 제2차 대전의 발발로 계획은 취소됐다. 그때 그 호텔이 지어졌다면, 그리고 수십 년간 영업을 했었다면…”이라는 가정으로 첼시의 창고건물에 ‘맥키트릭(McKittrick) 호텔’의 간판을 걸고 시작한 공연이다. 6층 건물, 100개의 방을 가득 채우는 세트와 소품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이야기를 엮어서 공간이 품는 스토리를 창조한 것이다. 공간 자체가 한편의 문학작품처럼 전개된 프로젝트였다. 시간차를 이용해서 건물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사용하지 않는 시간에 다른 용도로 쓰거나 임대해 주는 방식이다. 대표적인 장소가 교회다. 일주일에 한두 번, 예배의 기능 말고는 비어있는 경우가 많아서 콘서트홀이나 연극의 무대, 결혼식장 등의 용도로 자주 대여가 된다. 뉴욕과 같이 임대료가 비싼 도시에선 낮에 영업하는 식당을 재임대해서 한밤중에 심야식당이나 라면집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서울에도 을지로의 재봉틀 가게를 영업시간 이후에 인근 식당의 단체석으로 대여해 주는 곳이 있다. 낮에만 영업을 하는 카센터가 밤에 야외 포장마차로 이용되는 것도 비슷한 경우다.

시간별 활용 중 하나는 야간에 조명으로 공간을 재창조하는 작업이다. 원래 조명은 불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지만, 디자인의 요소를 첨가하면서 주간과는 다른 경관을 창조하는 것이다. 특정 건물이나 구조물, 문화재 등을 멋진 조명으로 연출함으로써 건물의 감상을 야간까지 연장하는 아이디어다. 이러한 모든 시도들은 결국 우리의 건축과 환경을 아끼면서 오래 사용하려는 생각의 발현이다. 뛰어난 역사적 건축물은 문화재로 지정되어서 보호되고, 지속가능성이 낮은 건물은 허물고 새로 짓는 게 맞다. 하지만 대부분의 건물은 고쳐서 쓸 수 있도록 지어졌다. 단지 개발을 목표로 무차별로 허물고 다시 짓는 것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 추억을 모조리 부수는 행위다.

자유롭게 공유하는 ‘제4의 공간’ 개념

마이애미대 케이지 갤러리. [사진 박진배]

마이애미대 케이지 갤러리. [사진 박진배]

우리 주변에는 계속해서 수리하면서 써야하는 물건 투성이다. 건물도 마찬가지다. 상업주의의 선두에 있는 고급백화점과 같은 곳에서 특급 컨시에어를 배치해서 판매하는 모든 상품과 관련된 수선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정말 멋질 것이다. 고객의 요구에 따라 우산이건, 시계건, 가구건, 집이건, 직접 고쳐주거나 고칠 수 있는 곳을 연결시켜 주는 것이다. 상품의 판매를 초월해서 보존과 유지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실현하는 가치는 ESG를 향한 생각으로 결부된다. 영어의 리모델링(remodeling), 리노베이션(renovation), 그리고 르네상스(Renaissance)의 ‘Re’는 ‘다시’, ‘재생’, ‘복원’의 뜻을 품는다.

컬러 팩토리 전시 공간. [사진 박진배]

컬러 팩토리 전시 공간. [사진 박진배]

요즈음 오피스 디자인의 트렌드는 ‘프리 어드레스(free address)’와 ‘자유로운 자세(free posture)’다. 사무실 내에 지정 자리가 없이 어디서도 업무를 볼 수 있는, 출근은 하되 재택과 같이 편한 자세로 융통성 있게 근무하는 환경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개념은 우리가 향유하는 여러 공간에 확장, 적용되고 있다. 지정된 공간을 소유하거나 지속적,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장소를 자유롭게 방문하면서 매 순간을 다르게 즐기는 것이다. 소유가 아닌 그저 그 공간 안에 자유롭게 내가 존재하는 것, 이것이 어쩌면 미래의 우리에게 요구되는 ‘제 4의 공간’ 개념일지도 모른다.

훈데르트 바서가 디자인한 비엔나 공장 외관. [사진 박진배]

훈데르트 바서가 디자인한 비엔나 공장 외관. [사진 박진배]

가까운 미래에는 정말 온라인이 불가능한 레스토랑이나 미용실 정도의 제한된 공간만이 남을 전망이다. 은행, 오피스, 대학 캠퍼스 공간도 빌 것이다. 이렇게 버려진 공간들을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는 혁신적인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는 공간들은 우리의 삶과 닮았다. 건물들은 우리의 삶을 담고, 또 오랜 기간 우리를 지켜보면서 보듬는다. 태어난 한 개인의 삶이 중요하듯이, 과거가 만든 하나의 건물에도 애착을 가지고 아끼며 포용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박진배 뉴욕 FIT 교수·마이애미대 명예석좌교수. 뉴욕 FIT 교수. 마이애미대 명예석좌교수. 연세대, 미국 프랫대학원에서 공부했다. OB 씨그램 스쿨과 뉴욕의 도쿄 스시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뉴욕 아이디어』 『천 번의 아침식사』 등을 쓰고, 서울의 ‘르 클럽 드 뱅’ ‘민가다헌’을 디자인했다. 뉴욕에서 ‘프레임 카페’와 한식 비스트로 ‘곳간’을 창업,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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