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은 삶 배우고 치유받는 곳” 슬기로운 무대 생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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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호 22면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엔젤스 인 아메리카’ 연출 신유청·주연 정경호 

신인섭 기자

신인섭 기자

지금까지 이런 연극은 없었다. 러닝타임 9시간이 넘어 드라마 시즌제처럼 1·2부로 나눠 공연된 국립극단의 ‘엔젤스 인 아메리카’ 얘기다. 미국의 대표적인 극작가 토니 쿠쉬너의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1993년 브로드웨이 초연 이래 지금까지 전세계 26개 이상의 언어로 활발히 공연되고 있는 ‘20세기 고전’이 이제야 국내 첫선을 보였다. 작년 말 ‘파트 원: 밀레니엄이 다가온다’에 이어 지난달 28일 ‘파트 투: 페레스트로이카’의 막을 올렸다. 보기드문 대작을 연극팬들은 전석매진, 기립박수로 영접했다. 요즘 최고 블루칩으로 통하는 스타 연출가 신유청(41)이 대극장 뮤지컬급 스케일로 구현한 무대도 볼거리였고,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 생활’로 전성기를 맞은 배우 정경호(39)의 연극 데뷔라 더욱 핫했다.

그런데 9개월 이상 이어진 장기 프로젝트가 갑자기 끝나버렸다. 지난 11일 코로나19 확진자 폭증 여파로 공연이 잠시 중단되는가 싶더니, 며칠씩 공연 취소가 거듭되다 결국 27일 예정이던 막공까지 못 올리게 됐다. 신유청, 정경호와의 만남은 다소 힘 빠진 상황에서 진행됐다. 아직 마지막 2회차 공연의 희망이 살아있던 20일,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속이지만 그래도 희망을 이야기하자”며 만났다. 그것이 ‘엔젤스’의 메시지이기도 하니까.

‘20세기 고전’ 국내에 첫선 보여

연극 데뷔작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서 천사와 씨름 끝에 예언자로 부름받은 에이즈 환자 프라이어를 인상적으로 연기한 배우 정경호. [사진 국립극단]

연극 데뷔작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서 천사와 씨름 끝에 예언자로 부름받은 에이즈 환자 프라이어를 인상적으로 연기한 배우 정경호. [사진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예상보다 훨씬 씩씩했다. 백스테이지로만 출입하다 극장 로비에 처음 와본다는 정경호는 아이처럼 신기해하며 포토존에서 인증샷부터 찍었다. “9개월 동안 코로나가 더 위협적일 때도 잘 연습하고 공연했는데, 이렇게 역설적인 상황이 됐네요. 하지만 끝난 게 아니라 생각해요.”(정) “중단 전 딱 열 번 정도 올렸을 때 너무 좋은 공연을 봤거든요. 그 마음으로 버티고 있습니다.”(신)

신인섭 기자

신인섭 기자

사실 다섯 시간짜리 공연은 보는 사람도 힘들다. 배우들은 매일 오후 2시극장에 출근해 밤늦게까지 온전히 쏟아부어야 했다. 프로 무대에 처음 서는 정경호에게 지나친 ‘하드캐리’ 아니었을까. “힘들어 죽을 것 같다가도 막상 신나고 재밌어서 하게 되던데요. 식구들(동료배우들)이 아니었으면 못 버텼을 수도 있는데, 다 똑같은 마음일 거예요. 처음 하는 건데 너무 좋은 작품을 선택해서 유청이 형과 좋은 선후배님들과 같이 공연 잘 올렸던 것 같아서, 지금 상황은 아쉬워도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정)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은 20년지기 절친이지만 프로 대 프로로 만난 건 처음이다. ‘엔젤스’가 두 사람에게 더욱 각별했던 이유다. “작품이 아니라 형 때문에 하게 된 거죠. 개인적으로 변화가 필요한 시기였는데, 이렇게 어려운 작업을 형과 같이 할 수 있어서 너무 의미 있었어요. 9개월 동안 힘든게 아니라 정말 재밌게 논 것 같아요. 남들은 지금 왜 연극이냐고 묻지만, 제 스스로 이런 걸 원했던 거죠.”(정) “엔젤스 대본을 봤을 때 경호가 딱 떠올랐어요. 늘 연극을 같이 하고 싶으면서도 다른 장르에 잘 있는 경호에게 누가 안됐으면 했는데, 작품도 너무 충만했고 같이 해준 사람들도 ‘식구’라고 할 정도로 되게 좋은 그림이 돼서 다행입니다. 앞으로 배우로서의 방향성에도 가치있는 경험이 됐으면 싶어요.”(신)

두 남자는 몹시 사랑하는 사이 같았다. 공연으로는 20년 만에 만났지만, 같이 살다시피 하며 연극을 하던 20대 대학시절이 어제인 양 추억을 방울방울 터뜨리며 깨를 볶았다. “그때 학교 캠퍼스가 되게 즐거웠어요. 02학번인 경호네가 들어오자마자 금세 친해져서 참 행복한 4월이었죠. 시키지도 않은 연극 만들어서 학교 곳곳에서 공연하고 주차장에서 족구하고 밤에는 안성왕족발 시켜 먹던 시절인데, 경호를 생각하면 그냥 뛰어다니고 놀고 소리치던 기억만 나네요.”(신) “그때도 형은 남달랐죠. 정말로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 같았어요. 1학년 때 처음 한 연극 ‘소나기’가 아직도 생생해요. 저는 주인공 소년이 아니라 우산장수 역할을 맡았는데, 비를 어떻게 내리게 할까 형이랑 밤새워 고민했었죠.”(정) “야외무대에서 비를 내리게 하는 미션이었어요. 경호가 오프닝을 열면서 관객에게 우산도 파는 중요한 역할인데, 무대로 쓴 큰 소나무 주변에만 예쁘게 비를 내리게 하는 게 쉽지 않더군요. 경호가 다른 친구 하나와 해보겠다고 밤 10시에 구호 외치고 시작해서 다음날 아침 10시까지 설치를 하고 마침내 펌프기를 돌리던 장면을 잊지 못해요. 해내고 나선 바위 위에 빨래처럼 축 늘어지더군요.(웃음) 작은 부분이지만, 한 공연에서 목표했던 걸 이뤄낸 첫 순간이었어요.”(신) “그거 하는데 12시간이 걸렸네요. 어리고 방법은 모르고 기술도 없으니, 뭘 해도 오래 걸리던 시절이었죠.(웃음)”(정)

공연1

공연1

처음 밟은 프로 연극 무대에 9개월간 올인하면서 어려움도 있었을 터. 하지만 “솔직히 모든 것이 다 좋았다”는 정경호에게 진심이 느껴졌다. “저로선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자리가 팬미팅 말고는 없었으니 신기하고 놀라웠죠. 첫 연극인데 객석도 꽉 차고 기립박수도 쳐주시니 너무나 감사했는데, 사실 준비하는 시간이 더 좋았어요. 형이랑 대본 파면서 얘기하는 게 가장 즐거웠죠.”(정) “경호는 어린 아이같아요. 아까 로비에 처음 와봤다고 감탄하는 것처럼, 모든 과정을 순수하게 놀라고 경탄하는 감각이 살아있다는 게 경호가 프라이어를 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였죠. 제가 놀란 건 대본에 깨알같이 학구적으로 적어놓은 노트들이었어요. 경호가 20년 동안 이렇게 진지한 노력으로 버텨왔구나 싶고, 많이 성장한 모습을 발견한 거죠. 저도 성장한 모습으로 보답해야 될 것 같아서, 아주 긴장되는 작업이었어요.”(신)

깨알같이 적은 대본 노트에 놀라

9개월의 대장정을 다소 아쉽게 마무리한 신유청 연출(왼쪽)과 정경호. 신인섭 기자

9개월의 대장정을 다소 아쉽게 마무리한 신유청 연출(왼쪽)과 정경호. 신인섭 기자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1980년대 보수적인 미국사회에서 죄인 취급받던 에이즈 환자 프라이어와 그의 애인 루이스의 서사를 축으로, 몰몬교·개신교·유대교 등 다양한 입장을 가진 인간군상이 엮이는 대하드라마 급 스토리다. 동성애자, 이민자, 에이즈 환자 등 소수자들이 보수적인 규범과 충돌하며 저마다 위기를 맞지만, 결국 모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혼란을 극복하고 삶을 회복한다. 그런데 다문화사회 깊숙이 내시경을 들이대 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들며 비추는 무대가 친절하진 않다.

“미국사회 인종과 종교의 다양성 같은 문제가 어렵지만, 잘 통과해야 그 안에 보편적인 빛을 만날 수 있어요. 미국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쿠쉬너는 의도적으로 그런 생각을 무너뜨리거든요. 무너짐이 쌓이고 쌓여 지붕까지 무너지면서 천사를 만나게 하는데, 오히려 그 순간엔 지식이 방해가 되죠. 진리라는 건 지식으로 만나는 게 아니라 그게 다 무너지고 나서 순수한 지각으로 꿰뚫어보는 거잖아요. 생각지도 못하게 그런 시각을 갖게 만들어주는 작품이라 위대한 것 같아요.”(신)

에이즈가 창궐하던 작품 속 배경은 코로나19 시대를 사는 우리의 현실과 평행우주처럼 보이기도 한다. 천사와의 씨름 끝에 당당히 에이즈를 극복하고 살아남은 프라이어가 이 시대에 가리키고 있는 진리는 뭘까. “사람들은 전염병이 신의 단죄인 것처럼 말들 하지만, 쿠쉬너는 우리 모두가 율법 아래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일 뿐이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에필로그에 ‘밀레니엄이 오면 우리 모두가 베데스다에서 씻김을 받을 것’이란 대사도 있는데, 거기 모인 네 사람이 너무 다르잖아요. 여전히 혼란스러운 세상이지만,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관심 가지며 하나가 돼서 버티고 있는 모습이 울림을 주는 것 같아요. 그게 이 시대를 이겨나기 위한 인간들의 태도 아닐까요.”(신)

하지만 연극은 힘이 없다. 9개월이라는 긴 여정 끝에서 한두 명의 ‘확진’ 앞에 무릎꿇게 된 이 무대가 정말 희망을 말하고 있는 게 맞을까. “코로나가 끝나야죠.(웃음) 극장이라는 모임의 공간에 힘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살면서 아주 중요하지만 바쁘기 때문에 놓치고 가는 가르침들이 극장에서 다 일어나죠. 춤추고 노래하는 뮤지컬 같은 장르를 보는 것도 결국 거기서 삶을 배우고 치유 받으려는 것이고, 그런 게 이뤄지는 게 극장이잖아요. 지금은 힘을 잃은 것처럼 보일지언정 쉽게 사라지지 않을거라 생각해요.”(신)

공연2

공연2

두 사람이 언젠가 이 9시간짜리 연극을 1·2부 동시 공연하는 날을 꿈꾸는 이유다. 무대 전환 문제로 이번에 포기했지만, 연속성이 있는 작품인 만큼 1·2부가 같은 시즌에 올라가야 제대로 음미할수 있단다. 2부 매듭을 제대로 짓지 못한 만큼, 연극팬들도 그 완결을 더욱 기다리게 됐다. “동시 공연이 소원이었어요. 원래 기획이 그랬고, 당연히 하는 줄 알고 있었죠. 무대에 흔치 않은 하나의 도전이잖아요. 유청이 형과 함께가 아니면 제가 언제 그런 걸 해보겠어요. 내년이든 내후년이든, 형과 함께 이 작품을 다시 한번 제대로 마무리하고 싶어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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