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패잔병 모욕"…천안함 장병들, 유독 이 트라우마 심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다른 사고 생존자들보다 ‘동료가 죽고 나만 살아남았다’는 트라우마가 유독 강하다.”
천안함 피격 사건(2010년 3월 26일)과 제2연평해전(2002년 6월 29일)의 생존 장병 등을 진료해온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군 사고 생존자들의 특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지난 16일 서울 회기동 경희의료원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지난 16일 서울 회기동 경희의료원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25일 ‘서해수호의 날’(매년 3월 넷째 금요일)을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 백 교수는 “기념일 반응이라는 게 있다”며 “그런 날이 다가오면 기사 노출이 많아지면서 트라우마를 재경험해 병세가 악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오랫동안 자신의 고통을 말로 꺼내지도 못하면서 병을 키워왔다”며 “자기 탓이 아닌데도 부끄러워하고 죄책감까지 느끼고 있다”고 했다.

세간의 왜곡된 시선도 생존 장병의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키우는 요소다. 백 교수는 “아픔을 이해해주는 분들이 많지만, 사건이 정치화되면서 SNS 게시물이나 언론 보도 댓글 등을 통해 진영 논리로 비난하는 경우가 있다”며 “‘패잔병’ 등의 모욕적인 표현이 이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고 지적했다.

제7회 '서해수호의 날'을 하루 앞둔 24일 서울도서관 외벽 꿈새김판에 제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사건, 연평도 포격전에서 희생된 서해수호 용사 55인의 사진과 함께 "누군가에겐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 얼굴들입니다"라는 문구가 게시돼 있다. 연합뉴스

제7회 '서해수호의 날'을 하루 앞둔 24일 서울도서관 외벽 꿈새김판에 제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사건, 연평도 포격전에서 희생된 서해수호 용사 55인의 사진과 함께 "누군가에겐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 얼굴들입니다"라는 문구가 게시돼 있다. 연합뉴스

우울증과 자살 예방 전문가인 백 교수가 재난사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세월호 사고와 가습기 살균제 사건 피해자들을 만나면서였다. 그러다가 천안함 사건 생존자들이 10년 넘게 보훈 신청조차 하지 못한 사실을 알게 됐다.

백 교수는 "생존자인 전준영씨가 쓴 『살아남은 자의 눈물』이란 책에는 그동안 이들이 고통을 감내하며 얼마나 힘겹게 살아왔는지 잘 드러난다"며 "전씨가 사비로 전국을 돌며 아픈 전우들을 만나서 돕는 사연을 보며 국가의 역할에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부터 14개월간 국가보훈처 보훈심사위원회에 참여했던 백 교수는 군 사고 생존자들이 보훈 신청의 기초적인 근거가 되는 ‘의무 기록’조차 없는 현실에 놀랐다고 한다. 그는 “공상 심의를 할 때 의무 기록이 가장 중요한 근거인데, 너무 빈 곳이 많았다”며 “미국·유럽 등 해외 사례와 비교할 때 피해자들의 특성이 반영되지 않은 정책적 한계가 기록 미비의 근원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미국처럼 동료 상담가 필요" 

그러면서 미 정부가 시행 중인 ▶찾아가는 보훈서비스 ▶동료 상담가 제도 등을 모범 정책으로 꼽았다. 백 교수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05년부터 미 보훈부는 전역 장병의 정신건강 회복을 위한 전담 인력을 6000명에서 2만명까지 늘렸다”며 “집으로 찾아가 보훈서비스를 안내하고 치료를 지원하면서 사회에 복귀할 수 있게 취업까지 알선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찾아가는 보훈서비스’의 핵심 인력이 다름 아닌 동료 상담가다. 백 교수는 “퇴역 군인들은 트라우마 때문에 전문의에게도 자신의 전장 경험을 잘 얘기하지 않으려고 한다”며 “그런데 정부가 채용해 소정의 교육을 거친 동료 상담가가 찾아가면 같은 아픔을 겪었다는 공감대 때문에 마음의 문을 더 잘 열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동료 상담가 역시 아픈 동료들을 도우며 사회적인 보람을 얻는 것은 물론 자신의 트라우마까지 치유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며 “더는 전준영씨 같은 사례가 나오지 않도록 정부가 시범사업이라도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7회 '서해수호의 날'을 이틀 앞둔 23일 저녁 대전현충원에서 서해수호 전사자 유가족, 참전장병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서해수호 55용사를 기리기 위한 '불멸의 빛'이 하늘을 비추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23일부터 25일까지 매일 저녁 55분간 서해수호 용사를 상징하는 55개의 조명을 이용해 제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사건, 연평도 포격전을 의미하는 3개의 큰 빛기둥을 하늘을 향해 비추는 '불멸의 빛'을 점등한다. 뉴스1

제7회 '서해수호의 날'을 이틀 앞둔 23일 저녁 대전현충원에서 서해수호 전사자 유가족, 참전장병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서해수호 55용사를 기리기 위한 '불멸의 빛'이 하늘을 비추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23일부터 25일까지 매일 저녁 55분간 서해수호 용사를 상징하는 55개의 조명을 이용해 제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사건, 연평도 포격전을 의미하는 3개의 큰 빛기둥을 하늘을 향해 비추는 '불멸의 빛'을 점등한다. 뉴스1

비단 군 사고 경험자만의 문제도 아니다. 백 교수는 “소방관들을 진료해보면 사고 현장에서 본 끔찍한 장면을 잘 잊지 못한다”며 “군ㆍ경찰ㆍ소방관 등 국가를 위해 특수한 임무를 하는 분들을 위한 트라우마센터 등 전문적인 대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본인뿐 아니라 유가족이나 생존자 곁에서 아픔을 함께 겪는 가족에 대한 진료 상담이 병행되도록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며 "신체적인 장애와 달리 PTSD는 적절한 치료에 따라 병세가 확연히 달라진다"고 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