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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탓에 손절 위기…'루소포비아' 불똥 튄 韓무용수 김기민

중앙일보

입력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하며 러시아를 떠난 볼쇼이 발레단의 스타, 올가 스미르노바(오른쪽). 2019년 공연 당시 사진이다. EPA=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하며 러시아를 떠난 볼쇼이 발레단의 스타, 올가 스미르노바(오른쪽). 2019년 공연 당시 사진이다. EPA=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이 벌이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 문화 애호가들을 딜레마에 가뒀다. 레오 톨스토이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대문호는 물론, 세계적 발레단인 볼쇼이와 마린스키는 물론, 유럽 3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에르미타주 등등이 러시아가 품은 풍요로운 문화 자산의 일부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루소포비아(Russophobiaㆍ러시아 혐오)가 확산하면서 러시아의 다수 문화인들 역시 ‘손절’의 대상이 되고 있다. 볼쇼이 발레단의 올가 스미르노바처럼 “(전쟁을 일으킨) 조국이 부끄럽다”며 네덜란드로 이주한 용기 있는 이들도 있으나, 개인의 선택으로 친(親) 푸틴 성향을 드러내며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에 반대하는 이들도 다수다. 그 사이엔 불편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는 이들도 있다. 자국이 일으킨 전쟁에 비판 목소리를 내자니 국내에서 살길이 막막하고 침묵을 지키자니 도매금으로 비판받을까 우려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이들이다.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발레리나에게 훈장을 수여한 직후 기념 촬영 중인 푸틴. [위키 커먼스]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발레리나에게 훈장을 수여한 직후 기념 촬영 중인 푸틴. [위키 커먼스]

친 푸틴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인물은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 마린스키 극장 예술감독이다. 푸틴이 권력의 정점으로 부상하기도 전인 1990년대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미국 뉴요커(the New Yorker)는 지난 3일 게르기예프 퇴출을 분석한 기사에서 “푸틴이 평범한 KGB 요원이었던 시절부터 게르기예프와의 우정은 시작됐다”고 전했다. 게르기예프는 푸틴의 문화 권력 오른팔로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대표적인 게 ‘마린스키’라는 브랜드다. 푸틴의 정치적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점으로 하는 마린스키 극장 및 발레단의 대부가 게르기예프다.

통영국제음악당 무대에 섰을 당시의 게르기예프 예술감독. [중앙포토]

통영국제음악당 무대에 섰을 당시의 게르기예프 예술감독. [중앙포토]

푸틴은 수년 전부터 공을 들여온 극동 지역 개발에도 마린스키를 활용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마린스키 극장이 있는 이유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해 푸틴과 정상회담을 했을 때도 이 극장은 주요 방문 후보지로 꼽혔다. 김 위원장의 동선 문제로 실제 방문은 이뤄지지 않았으나 마린스키 발레단의 블라디보스토크 극장은 여전히 푸틴의 극동 개발 야심의 상징이다. 그 상징을 현실에서 뒷받침하는 인물이 푸틴의 ‘절친’ 게르기예프 예술감독이다.

게르기예프의 친 푸틴 성향은 수년간 아슬아슬한 화약고였다. 이번 전쟁의 전조였던 푸틴의 2014년 크림반도 합병을 두고 게르기예프는 공개 지지를 선언했던 바 있다. 당시엔 게르기예프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논란까지 번지진 않았으나 이번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유럽과 미국의 반전 분위기는 반(反) 게르기예프로 확산했다. 게르기예프가 이번 전쟁에 대한 입장 표명을 요구받고 침묵을 지키는 방식으로 조용한 지지의 뜻을 간접 표명한 뒤다. 오스트리아의 빈 필하모닉부터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까지, 게르기예프 퇴출 결정을 내렸다. 뉴요커는 “게르기예프는 푸틴 지배 하의 (러시아) 음악계의 악몽을 상징한다”며 “게르기예프에 대해 세계 음악계는 지나치게 오래 침묵을 지켜왔고, 이제 깰 때가 됐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하는 여성이 이마엔 우크라이나 국기를, 양볼엔 '평화'라는 문구를 새긴채 시위 중이다. 로이터=연합뉴스

프랑스 파리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하는 여성이 이마엔 우크라이나 국기를, 양볼엔 '평화'라는 문구를 새긴채 시위 중이다. 로이터=연합뉴스

발레계 역시 뒤숭숭하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돼 프랑스에서 ‘낭만 발레’로 꽃을 피운 이 무용 장르는 러시아에서 ‘고전 발레’로 융성했다. 여성 무용수들의 짧은 접시형 치마인 일명 ‘클래식 튀튀’ 역시 러시아에서 마리우스 프티파 안무가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파트너십 하에 본격화했다. 발레 뤼스(ballet Russe)라는 말도 생겨났는데, 러시아식 발레라는 프랑스어다. 지금도 러시아는 발레의 메카로 통한다. 한국인 무용수도 맹활약 중이다. 게르기예프가 예술감독인 마린스키의 발레단 간판 격인 수석무용수 김기민 씨다. 타고난 피지컬과 갈고닦은 테크닉으로 수석 무용수에 등극한 그는 그러나 푸틴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 외에선 공연이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반대하는 세계 공연계가 러시아 예술단체 및 예술인들의 공연을 줄줄이 취소하고 있어서다.

김기민 무용수. 사진 Photographer Baki(박귀섭)

김기민 무용수. 사진 Photographer Baki(박귀섭)
김기민 무용수. 사진 Photographer Baki(박귀섭)

러시아 문화인들의 딜레마 중 하나는 정치와의 끈끈한 관계다. 게르기예프뿐 아니라, 유수의 문화인 중 일부는 푸틴의 대통령 직속 문화위원회, 또는 두마(Duma)라고 불리는 의회의 문화 관련 위원회 소속 의원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국내에도 팬층이 두터운 발레리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가 대표적이다. 자하로바는 2006년 푸틴의 대통령 직속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으로, 2008년엔 두마 의원으로 선출됐다. 자하로바는 2018년 알자지라 방송과 인터뷰에서 “문화 관련 분야는 내가 기여를 할 수 있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정치권의 부름에) 응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 ‘부름’의 주체는 푸틴이었다. 푸틴은 자하로바에게 명예 훈장도 직접 수여했다.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의 발레 테크닉만큼은, 여전히 최고다. [중앙포토]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의 발레 테크닉만큼은, 여전히 최고다. [중앙포토]

일각에선 이를 정치권과 문화계의 유착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러시아 특유의 역사 때문이다. 냉전 시대 소비에트연방(소련) 출신 문화인들은 다수가 망명을 택해 서방으로 이주했고, 이는 러시아 정부엔 아픈 부분이어서다. 유명 발레리노이자 배우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열연한 영화 ‘백야’ 등이 당시 분위기를 그린 대표작이다.

이런 복잡한 맥락 속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푸틴뿐 아니라 모든 러시아 예술인을 도매금으로 넘기는 건 부당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뉴요커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러시아 문화인들을 모두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문화인들을 지원하는 것”이라며 최근 뉴욕에서 열린 공연 무대에서 우크라이나 국가가 깜짝 연주되거나, 우크라이나 출신 무용수들을 지원하는 목소리 등을 집중 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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