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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식탁으로 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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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최지영 기자 중앙일보
최지영 경제에디터

최지영 경제에디터

국수·만두·빵 등에 밀가루를 많이 쓰는 국내 자영업자들이 밀가루 사 모으기에 나섰다는 얘기가 들린다. 값 폭등 걱정 때문이다. 예상보다 빨리, 사람들이 국내 먹거리 수급 상황을 우려하고 나섰다. 지난해 11월 칼럼에 “요소수 부족 사태로 시끄럽지만, 이는 시작일 뿐 더 큰 파고가 닥치고 있다. 다음 파고는 먹거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중앙일보 11월 19일자 29면)고 썼다. 안타깝게도 전망은 빗나가지 않았다.

당시에도 식량 가격 폭등의 전조는 분명했다. 기후 변화로 인한 가뭄과 흉작, 그리고 코로나19로 인한 물류난이 원인이었다. 여기에 그땐 상상도 하지 못했던 메가톤급 변수가 얹어졌다. 설마 일어날까 싶었던 풀 스케일 전면전이다.

서민밥상 강타한 식량값 폭등
수개월 안에 더 악화할 것 자명
기존 대책으론 감당할 수 없어
긴급방안 세워 불안감 줄여야

전쟁으로 원자재·석유·비료 값이 폭등해 글로벌 식량 생산 차질이 심각해졌다. 이달 초 스페인 팜플로나에서 농민이 트랙터에 ‘푸틴을 막아라’는 배너를 붙이고 시위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전쟁으로 원자재·석유·비료 값이 폭등해 글로벌 식량 생산 차질이 심각해졌다. 이달 초 스페인 팜플로나에서 농민이 트랙터에 ‘푸틴을 막아라’는 배너를 붙이고 시위하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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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한국 정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국내에 불러올 먹거리 여파를 제한적으로 봤다. 침공 초기 정부는 “러시아·우크라이나산 곡물 수입 비중이 3년간 전체 수입의 10% 수준이라 단기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진단했다. 이 인식은 명확히 빗나갔다.

전쟁 초기 정부가 파악한 국내 업계의 러시아·우크라이나산 사료용 밀과 옥수수 재고는 밀의 경우 오는 7월 말, 옥수수는 6월 중순까지였다. 일단 전쟁이 단기전으로 끝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원윳값 상승→밀가루·옥수수·보리값 상승→비료 부족→파종 지체→사료 부족→가축값 상승→세계적인 식량 부족’의 나비 효과를 이미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한 달 만에 전 세계 밀값은 21%, 보리는 33%, 일부 비료는 40% 상승했다. 이미 지난해 한 해 동안 밀은 69%, 옥수수는 36%, 보리는 82% 상승한 터다.

여기에 비료 문제도 심각하다. 러시아는 세계 비료 생산의 15%를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달부터 수출을 전면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이미 유럽의 대형 비료 생산업체 상당수가 전쟁 발생 전부터 원윳값 상승에 생산량을 줄인 터다. 비료의 상당수는 원료로 천연가스가 필요하다.

세계 최대 콩 생산국인 브라질은 콩 생산에 꼭 필요한 탄산칼륨 비료 수입이 제재로 막혔다. 칼륨 비료의 주 수출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원해 제재를 받는 벨라루스다. 브라질 콩의 대부분은 중국으로 수출돼 가축 사료로 쓰인다.

중국도 심각한 비료 부족에 시달린다. 홍콩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에 따르면 중국은 칼륨 비료의 53%를 러시아와 벨라루스에서 수입하고 있다. 이미 중국은 전쟁 발발 전부터 비료 부족으로 지난해 10월부터 비료 원자재 수출까지 제한하고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콩·옥수수를 재배하는 미국 대형 농장주 상당수도 미리 선금을 지불했는데 비료를 못 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브라질에서 미국 텍사스까지 농부들이 비료를 덜 쓰기 시작했으니, 이는 한 해 뒤 식량 생산에 더 큰 악영향을 미칠 것이 자명하다. 유엔식량기구(WFP)는 “현재 식량 상황은 재앙 수준”이라며 “세계 2차대전 후 최대의 위기”라고 밝혔다.

이렇게 되자 국제 곡물 수급 시장에서 한국은 중국과 인도라는 덩치 큰 대국과 소위 맞장을 떠야 할 상황에 직면했다. 중국과 인도는 자국민이 먹을 식량 확보를 위해 글로벌 밀 시장에서 안 그래도 부족한 물량을 두고 필사적인 확보 전쟁에 뛰어들었다. 세계 최대 밀 생산국이자 소비국인 중국의 탕런젠 농림부 장관은 최근 “극심한 홍수로 한 해 심어야 할 밀 파종의 3분의 1을 제때 하지 못했다”고 실토한 바 있다. 예년 같으면 소량의 밀을 수출하는 인도 역시 지난해보다 3배 많은 밀을 글로벌 시장서 사들이고 있다. 밀뿐 아니라 옥수수와 보리 등 다른 곡물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한국 정부는 전쟁 발생 초기에 수입 곡물 가격이 치솟으면 ^원료구매 자금 금리 인하 ^주요 곡물 신규 계약 시 안정적 공급이 가능한 원산지로 변경 ^곡물 국내 반입 시 신속 처리 방안 확보 등을 대책으로 내놓은 바 있다. 지금 같은 글로벌 먹거리 파동 상황에선 미약한 수준이다.

현 정부는 물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와 새 정부는 서민의 먹거리 걱정을 엄중하게 받아들여 대책을 세우길 바란다. 먹거리 불안은 빈곤국에선 정치적 소요까지 일으키는 문제다. 한국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이미 서민들이 지갑 걱정을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풀어야 할 다른 경제 과제도 산적하지만, 먹거리 수급과 가격 안정 대책을 최우선으로 마련할 것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