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현지시간) 러시아 육·해·공군이 우크라이나 국경 3면에서 진격했을 때 전쟁이 4주 넘게 지속되리라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다. 러시아는 수도인 중북부 키이우와 동북부 하르키우, 동남부 마리우폴 등 주요 도시에 미사일 세례를 퍼붓고 있지만, 이 도시들의 항복을 받아내진 못하고 있다. 개전 8일째인 지난 3일 서남부 헤르손을 점령한 정도다. 속전속결로 ‘러시아 제국’의 화려한 부활을 꿈꿨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계획도 진창에 빠졌다.
"세계 2위 러軍 위상, 누더기됐다"
우선 세계 2위 군사대국이라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보다 10배 많은 군용기를 보유하고도 한달째 제공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 지상군의 주력인 기갑부대 역시 우크라이나군의 소규모 기습과 후방공격에 번번이 당했다. 연료·탄약·식량 부족 현상까지 겪으면서 사기도 떨어진 것으로 관측된다.
러시아 정부는 지난 2일 전사자 498명, 부상자 1597명이라고 개전 이래 처음 발표했다. 반면 미국 정보 당국은 지난 16일까지 러시아군 사망자가 약 7000명, 부상자는 1만4000~2만1000명일 것으로 추산했다. 여기엔 장성 6명도 포함된다. 군사 장비·무기도 1380대 소실한 것으로 파악됐다. 우크라이나군에 비해 무기 4배, 병력 5배의 손실이다. 러시아가 극초음속 킨잘 미사일을 실전에 투입하고 '핵무기 카드'를 흔드는 것도 이처럼 불리한 전세에서 나오는 조바심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러시아군이 향후 시가전 국면에서도 우위를 보이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영국 싱크탱크 헨리잭슨소사이어티의 타라스 쿠지오 연구원은 “군사 초강대국이라는 러시아의 명성이 누더기가 됐다”고 말했다.
30년 후퇴한 러 경제, 에너지 패권도 흔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서방의 경제 제재다.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 차단, 푸틴과 올리가르히 개인 자산 동결 등에다 주요 기업들의 러시아 시장 철수로 루블화 가치는 폭락하고 국가신용등급은 국가부도 직전단계다. 지난 16일 간신히 넘긴 디폴트(채무 상환 불이행) 위기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미 경제매체 CNBC는 “푸틴은 옛 소련 붕괴 이후 30여 년 간 쌓아온 러시아의 시장경제 발전을 단번에 무너뜨릴 것”이라고 전했다. 국제 사회의 강도 높은 제재는 최소 5년간 지속될 것이고, 여파는 수십년 간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CNN은 “글로벌 기업의 철수는 러시아 시장 개방 시대의 종말의 의미한다”며 “충격파가 조만간 러시아를 강타할 것”이라고 전했다.
러시아의 ‘에너지 패권’도 흔들리고 있다. 러시아는 세계 3대 석유생산국이자 세계 최대 천연가스 수출국이다. 국가 예산의 40%를 에너지 수출로 벌어들였다. 푸틴 대통령은 서방의 대러 제재에 대한 보복으로 원유 공급을 줄이며 ‘에너지 차르’로서의 위상을 스스로 망가뜨렸다. 독일은 지난 20일 카타르와 액화천연가스(LNG)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영국 에너지회사 BP, 네덜란드 셸, 프랑스 토탈에너지 등은 올 연말에 종료되는 러시아와의 경유·원유 공급 계약을 갱신하지 않기로 했다. 석유 전문가 다니엘 예르긴 IHS마킷 부회장은 영국 이코노미스트 기고문을 통해 “러시아가 20년 이상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자로 쌓아왔던 명성을 불과 수주 만에 무너뜨렸다”고 했다.
"러 제국 사망 진단서에 푸틴 이름 적어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향력과 러시아제국의 부활 가능성을 동시에 잃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영국 역사학자인 사이먼 샤마는 파이낸셜 타임스(FT) 칼럼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은 전쟁 중 살과 피와 눈물로 정체성을 각인시켰다”며 “푸틴은 완벽하게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유발 하라리 이스라엘 히브리대 교수는 “러시아제국의 사망 진단서엔 마하일 고르바초프가 아닌 푸틴의 이름이 적힐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백악관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세웠던 세 가지 목표가 ‘우크라이나 예속’ ‘러시아 국력 및 위신 제고’ ‘서방의 분열 및 동맹 약화’였다”면서 “현재까지 모두 실패했다”고 22일 평가했다. 반면 러시아는 “정확히 사전에 설정한 계획과 목적에 부합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입장이다.
러시아가 이번 전쟁의 목표를 명시한 적은 없지만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저지가 일차적이란 건 분명하다. 러시아는 또 우크라이나와 4차례 휴전 협상에서 ^우크라이나의 '중립국화'와 '탈나치화' ^크림반도에서의 러시아 주권 ^도네츠크·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의 독립 인정 등을 주장해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에 대해 "영토 문제에서 1인치의 양보도 없다"는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일각에서 젤렌스키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 간 정상회담이 전쟁의 '출구 전략'으로 거론되지만 전망이 밝지 않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