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일본에서 대사 10명 지켜보며 느낀 '대사의 공식'
정치인이라 외교 못하지 않고, 외교관이라 잘 하지 않더라
주일대사에는 '보스 기질', 신뢰감 각인된 인사 바람직
주미대사에는 '발로 뛰는' 활동 영역 넓은 실력파 적합
윤석열 신정부 출범에 대한 전세계의 관심이 뜨겁습니다. 지난주 일본 NHK 뉴스시간에는 윤 당선인의 인수위원회 현판식 참석 리포트까지 나오더군요. 좀처럼 없던 일입니다. 당장 윤석열 정부에겐 무너진 대한민국 외교를 시급히 일으켜 세워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그 중 첫 단추가 '제대로 된 대사' 고르기입니다. 유럽 외교가엔 이런 말이 전해내려옵니다. "대사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외국에 거짓말을 하도록 파견된 성실한 인간이다." 대사의 중요도가 그닥 크지 않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반대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저는 후자로 봅니다.
당장 지난 5년 문재인 정부의 '인사 재앙'이 그걸 증명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취임 직후 이른바 4강(미국·일본·중국·러시아) 대사에 전원 비외교관 출신을 발탁했습니다.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조윤제 주미대사, 이수훈 주일대사, 노영민 주중대사, 우윤근 주러시아대사였습니다. 이 중 일부는 차분하게 상대국과의 외교를 이끌었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낙제점에 가까웠다는 것이 대체적 평가입니다. 하지만 1년에 한번 있는 재외공관장 회의에 와선 "중진의원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통령 바로 옆자리에 앉는 예우를 받았습니다. 당시 한 미국 측 주요 인사가 "그래도 한국의 유일한 동맹이 미국인데, 주미대사 자리 배치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라 했던 게 기억에 생생합니다. 당시 조윤제 주미대사 자리는 대통령의 옆의 옆의 옆자리였습니다. 외교부 의전 경험자에게 물었더니 "그건 청와대 행사라 청와대에서 정한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지난 5년 대한민국 외교는 정치의 부속물이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12월10일 청와대에서 열린 '2018년도 재외공관장 만찬'에서 만찬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3/24/4e0cc08d-6e67-4d9e-8597-d40d7646d252.jpg)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12월10일 청와대에서 열린 '2018년도 재외공관장 만찬'에서 만찬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벌써부터 윤석열 정부 4강 대사 이름이 자천타천 거론됩니다. 아직은 소문 수준입니다. 공을 세웠다는 정치인들 이름도 나오고, "이젠 정치인이 아닌 외교 전문가(주로 관료이겠죠?)를 보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사실 정치인이라고 외교를 못하는 건 아닙니다. 또 외교 관료 출신이라고 외교를 잘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나라 상황에 맞는 안성맞춤 인사를 해야 합니다. 어쩌다보니 지난 10여년 미국·일본 등 해외에서 대사 10명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서로 스타일도 다르고 당시 주재국 상황도 다르니 일반화 하긴 힘듭니다. 그래도 나름의 '대사 공식'은 보이더군요.
#1 일본
일본에 근무하는 동안 조세형(2009년 별세), 라종일, 유명환, 권철현, 신각수, 이병기, 유흥수, 그리고 현 강창일 대사 등 8명이 주일대사로 있었습니다. 정통 외교관료 출신은 유명환·신각수 전 외교 1차관 두 사람. 나머지는 정치인으로 분류 가능합니다. 유명환, 신각수 대사는 뛰어난 실무 능력과 문화적 소양을 갖춰 일 외교가에선 인기가 높았습니다. 하지만 대사 재임 시 대통령이던 노무현(유 대사), 이명박(신 대사) 대통령과 각별한 친분이 없어 '고생'도 했습니다. 2012년 8월 10일 늦은 오후 시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사실이 전해졌을 때 우연히 제 옆에 같이 있었던 신 대사가 화들짝 놀라던 모습이 기억에 선합니다. 주재국 대사도 몰랐던 겁니다. 일본은 의원내각제입니다. 국회의원의 힘이 강합니다. 대통령제 하에선 관료가 차관을 지낸 뒤 장관까지 올라가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일본에선 장관은 거의 전원 정치인이 맡습니다. 관료의 정점은 사무차관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책 기안, 조율 등 실무는 대부분 관료의 몫이지만 큰 틀의 의사결정은 '정치'가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과 '말'(언어구사 능력 및 관심사)이 통하는 정치인 출신 대사들이 그동안 많이 등용돼 왔습니다. 개인적인 느낌으론 일본 정치인이나 고위 외교 관료들과 케미가 좋았던 정치인 출신 주일대사의 공통점은 '보스 기질'입니다. 여전히 일본 사회에는 '무사도' 정신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병기 전 주일한국대사와 야치 쇼타로 전 일본 국가안전보장국 국장
대표적 사례가 이병기, 유흥수 두 대사입니다. 최근에 만난 일본의 한 고위 인사는 "국정원 특활비 논란으로 이병기 대사가 수감됐을 때 친소의 차이는 있지만 그를 아는 모든 일본 인사들이 슬퍼했다"고 하더군요. 일부 인사는 직접 위로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본국 외교부나 청와대의 지시를 무조건 전달하는 역할이 아니라 "사명감을 갖고 내가 당신과 함께 이 일을 해내겠다"는 진정성을 각인시키는 게 대일 외교에선 필수입니다. 만찬문화가 뿌리깊은 만큼 사케를 주고받을 정도의 주량이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모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와 유흥수 전 주일한국대사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연합]](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3/24/2d613276-f678-48bc-9479-f6747894d2cf.jpg)
모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와 유흥수 전 주일한국대사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연합]
경험 상 보면 일본인들은 자신의 주장만 반복해서 너절히 늘어놓는 사람보다 일단 남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를 표한 뒤 자신의 입장을 '논리 반 감성 반'으로 말하는 사람에 넘어갑니다. 꾸준한 스킨십이 필수입니다. 한국인은 쾌속정, 일본인은 항공모함에 비유됩니다. 일본 정치인이나 외교 관료 모두 일단 마음을 굳히면 쭉 같은 방향으로 무서운 속도로 나아갑니다. 방향을 틀기까지 시간이 듭니다.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지난 5년 문재인 정부 하의 주일대사는 파국을 피하는 역할만 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것도, 하려고 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덩달아 대사관 분위기도 느슨해졌습니다. 과하게 표현하면 개점휴업입니다. 지난 2년 여 동안 주일대사는 일본 총리는 커녕 외상과의 만남조차 단절돼 있습니다. 2년 여 전 청융화 주일중국대사의 이임식 때는 전·현직 총리 3명을 비롯 일본 정관계 인사가 1000명 넘게 발 디딜 틈 없이 운집했습니다. 람 이매뉴얼 신임 주일미국대사는 지난달 부임 9일 만에 외상을 만났습니다.

2019년 도쿄의 한 호텔에서 열렸던 청융화 주일중국대사의 이임 행사에서 아베 신조 당시 총리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제는 개선을 모색하는 역할, 라이프라인(생명선)을 구축하는 역할을 차기 대사가 해야 합니다. "(만나기) 싫으면 말고!"론 안 됩니다. 양국 지도자가 물꼬를 트면 그 이후 총 관리책임자는 대사의 몫입니다. '재팬스쿨'이 시들해졌다지만 일선에서 물러난 정치인, 전직 외교관 중 적임자는 있습니다. 발상을 전환해 일본과 끈이 두터운 기업인 출신 인사를 과감하게 발탁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2 미국
주일대사와 주미대사의 가장 큰 차이는 '자리'에 대한 존중이라 생각합니다. 일본은 주일대사로 온 인물이 거물인지, 그릇이 큰 지 작은지, 우호적 성향인지를 내부적으로 판단하는 반면 미국은 주미대사란 자리에 대한 대우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아무리 총리 경험자가 주미대사로 와도 미국에선 만날 수 있는 '급'이 제한돼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대놓고 그렇다고 이야기를 하지는 않지만요.

미국 워싱턴의 주미한국대사관 건물
하지만 이런 고정관념이 늘 맞는 건 아닙니다. 1년 여 전까지 주미일본대사였던 스기야마 대사는 "외교는 국무부에서만 정해지는 게 아니다. 보다 워싱턴의 코어(핵심) 그룹에서 정해지는 것"이란 판단아래 100명 있는 상원의원 의회 사무실을 취임 직후 사전 약속없이 다 돌았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미국의 풍토에선 자신을 좀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까 주저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때 맺어진 인연들이 대사 생활 동안 큰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또한 미국의 특성 상 각종 취미, 스포츠, 파티 문화에 익숙한 인사가 유리한 측면이 있습니다. 2001년 9월부터 2008년 5월까지 6년 10개월 간 주미대사를 하며 '가장 미국적인 일본대사'로 불렸던 가토 료조는 메이저리그 야구의 역사부터 시작해 개별 선수들의 신상까지 달달 외우며 미국 사회를 파고 들었다고 합니다.

지난 2020년 1월 이수혁 주미대사가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실 워싱턴에는 늘 보는 외교 관료보다 메트로폴리탄 클럽 같은 워싱턴의 핵심 사교모임에 속한 셀럽, 재력가들이 워싱턴 정보에 더 밝고 영향력이 큰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새 주미대사는 한국 정치권 눈치를 살피며 미국에선 폼만 잡는 그렇고 그런 인사보다 '발'로 뛰는, 에너지 넘치는 인사가 훨씬 더 적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워싱턴에 근무할 당시 미국의 한 베테랑 외교관으로부터 들었던 한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한국 외교관들은 만나면 뭘 해달라고 바로 부탁한다. 그런데 일본 외교관은 '내가 뭘 해볼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한국은 부탁해서 해결해주면 그 후로 연락을 끊는다. 그리곤 한참 있다 연락오면 또 부탁이다. 그래서 전화를 안 받으려 한다.”
또 하나 첨언. 가급적 주미, 주일대사는 재임 후 외교부장관을 노리지 않을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다음'을 염두에 두면 행동 반경도 그만큼 확 줄어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