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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진중권 칼럼

푸틴의 상상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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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푸틴은 자신이 일으킨 전쟁을 ‘극단적 민족주의자와 네오나치들로부터 우크라이나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한 ‘특수작전’이라 불렀다. 당치도 않은 얘기다. 우크라이나에서 네오나치라 불릴 만한 집단은 아조프 연대뿐인데, 이들마저 정규군에 편입된 이후로는 극우적 성격이 많이 희석된 상태다. 푸틴의 ‘서사’를 믿고 우크라이나 땅을 밟은 러시아 병사들은 눈 앞에 펼쳐지는 ‘현실’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정작 그 땅에 네오나치는 없었고, 자기들이 해방시키려는 그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이다. ‘서사’와 ‘현실’의 엄청난 괴리.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푸틴은 젤렌스키 정권을 네오나치라 부르나, 정작 히틀러에 가까운 것은 푸틴 자신이다. 언젠가 히틀러는 말했다. “나의 표상이 너희들의 세계다.” 2차대전 당시 독일의 국민들은 ‘게르만 세계제국’이라는 히틀러의 표상을 진지하게 믿었다. 그와 똑같은 일이 지금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다. 푸틴의 ‘서사’를 굳게 믿는 것은 병사들만이 아니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는 상황에서, 푸틴은 20만 러시아 국민을 모아 ‘크림반도 합병’을 축하하는 축제를 벌였다. 러시아의 피겨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은 가슴에 ‘특수작전’을 상징하는 ‘Z’ 표식을 달고 그 자리에 참석했다.

히틀러 같은 망상으로 러시아 세뇌
푸틴 사상의 토대는 두긴의‘지정학’
‘유라시아 제국으로 서방과 싸우자’
우크라이나가 망상 깨기 위해 항전

포로로 잡힌 병사가 집에 전화를 걸어 사실을 알려도 부모마저 자식의 말을 믿지 않는다. 정부의 거짓말에 완벽히 세뇌가 되어버린 것이다. 푸틴의 서사는 한 개인의 망상을 넘어 이미 러시아 국민 대다수의 집단적 소망이 되었다. 푸틴의 ‘표상’이 정말로 러시아인들의 ‘세계’가 된 것이다.

푸틴의 상상계는 알렉산드르 두긴의 ‘지정학’ 사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파시스트 철학자의 꿈은 러시아어 사용자들이 사는 모든 지역을 하나로 통합하고, 러시아를 중심으로 주변의 아랍국가들을 아우르는 거대한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하여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세계에 대항하는 데에 있다.

“유라시아와 우리 공간, 즉 그 심장인 러시아가 새로운 반(反)부르주아, 반미 혁명의 무대다. 유라시아 제국은 공통의 적이라는 근본원리 위에 구축될 것이다. 그 원리는 대서양주의와 미국의 전략적 통제를 거부하고, 자유주의적 가치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지정학의 기초, 1997)

여기서 ‘우리 공간’은 나치가 영토확장 전쟁을 하며 내세운 ‘생활공간’ (Lebensraum)과 같은 말이다. 두긴은 2008년에 이렇게 예견한 바 있다. “우리 군대는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와 전 국토, 심지어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를 점령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일부다.”

‘러시아 르네상스’의 꿈. 이 제국주의적 망상을 뒷받침하는 것은 거대한 음모론. “미국은 제 손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인들의 손으로 러시아와 전쟁을 하려 한다. 미국은 이 전쟁을 위해 유로마이단 사태 동안 쿠데타를 일으켰다. 미국은 이 전쟁을 하려고 네오나치 러시아 혐오자들을 길러냈다.”

러시아로부터 주권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투쟁은 미국과 서방의 사주를 받은 자들의 반러 인종주의 책동이라는 얘기다. “우크라이나의 유로마이단은 러시아 통합의 진전에 대한 서방의 응전이었다.” 허황한 음모론이 졸지에 핵무기를 가진 나라의 외교안보전략이 되어 버린 것이다.

두긴과 푸틴의 개인적 망상이 국가의 정책이 된 것은, 그 망상이 실은 대다수 러시아 국민이 공유하는 욕망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리라.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러시아인으로서 소비에트 제국을 그리워하지 않는다면 가슴이 없는 것이고, 그 시절로 돌아가려고 한다면 머리가 없는 것이다.’ 프로파간다는 원래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호소하는 법이다. “오직 위대한 러시아, 즉 유라시아 연합을 복구해야 비로소 우리는 믿을 만한 국제적 플레이어가 될 수 있다.” 두긴의 이 말 속에는 국제무대에서 다시 위대해지고 싶은, 몰락으로 좌절한 구(舊)제국 신민들의 욕망이 담겨 있다.

두긴은 이 싸움을 서구와 동방, 두 문명 사이의 영적 전쟁으로 본다. 러시아 정교는 서구 가톨릭교회에서는 사라진 비잔틴 영성(靈性)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두긴에게 서구문명은 “하늘에 대한 지상의 반란”, 즉 영적 타락이다. 이 괴상한 정치신학이 푸틴과 두긴이 꿈꾸는 ‘러시아 르네상스’의 정신적 토대다.

비록 신학적으로 왜곡된 형태이지만, 이 유라시아 연합의 망상에는 모종의 진실이 담겨 있다. 실제로 구소련연방에 속했던 나라들이 러시아로부터 멀어져 급속히 서구화되고 있다. 거기에서 비롯된 고립의 두려움을 그들은 ‘러시아를 향한 서방의 전쟁’이라는 음모론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아니라 유럽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한다. 이는 안보나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체주의가 아닌 자유주의, 영성주의가 아닌 세속주의, 일인독재가 아닌 민주주의에 대한 욕망이 깔려 있다. 우크라이나의 항전은 시민혁명이다. ‘슬라바 우크라이니!’ (우크라이나에 영광 있으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