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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퍼스펙티브

대통령과 공공기관, 따로 노는 임기가 책임정치 훼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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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정권 교체기마다 반복되는 ‘알박기 인사’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곳곳에 알박기와 나눠 먹기가 성행해 모럴 해저드가 심각하다. 헌법을 월권하는 임명권 행사를 즉각 그만둬야 한다.”

2017년 4월 6일, 윤호중 당시 민주당 정책위원장. 황교안 국무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이 미래창조과학부 실장을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에 임명하자 날을 세웠다. 임시 관리자 격인 ‘권한 대행’의 인사권 행사를 문제 삼았다. 황 총리는 “국정 공백이 있어선 안 된다. 법적 하자가 없다”고 대꾸했다.

헛다짐 그치는 낙하산 인사 근절
정치적 임용 불가피성 인정하고
인사권자 임기와 연계가 현실적
불투명한 임용 절차는 개선해야

“정부가 낙하산 알박기 인사를 하고 있다. 보은 인사는 대통령직의 공적 권한을 사적 목적으로 남용하는 것과 다름없다.”

2022년 3월 17일,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 청와대가 임기 말 공공기관장과 임원 인사를 강행하자 목소리를 높였다. 청와대는 “5월 9일 임기까지 인사권은 대통령의 몫”이라며 윤석열 당선인 측의 인사 협의 요구를 거절했다. 공수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공수의 논리는 5년 전과 똑같다. 공격 논리는 ‘임기 말 월권’이고, 방어 논리는 ‘엄연한 합법’이다.

반복되는 신·구 권력 인사권 갈등

퍼스펙티브

퍼스펙티브

권력 교체기 신·구 권력의 인사 갈등은 반복된다. 문재인 청와대 대 윤석열 당선인도 예외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10월부터 공공기관장을 잇따라 새로 임명했다. 한국농어촌공사, 한국공항공사, 한국마사회, 한국철도공사, SR(수서고속철도 운영사), 건축공간연구원 등이다. 같은 기간 각종 협회·공사·공단·재단 등에 새로 임명된 이사·감사는 훨씬 더 많다. 청와대, 민주당, 국정원, 시민단체 출신 인사가 망라됐다.

공공기관 공시 시스템인 알리오에 따르면 공공기관은 현재 351곳(부설기관 제외). 이 중 66%가 기관장 임기를 1년 이상 남겨 놓고 있다. 임기가 2년 이상 남은 곳은 43%에 달한다. 현 정부에서 임명된 공공기관장 상당수가 새 정부 임기 중반기인 2024년까지 자리를 지킬 공산이 크다. 정부 정책의 집행 및 지원을 담당하는 공공기관이 새 정부와 엇박자를 낼 소지가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홍장표 원장(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임기는 2024년 5월 말까지다. 문재인 정부의 대표 정책인 소득주도성장(소주성)의 설계 당사자가 윤석열 정부와 2년 동안 ‘동거’해야 하는 어색한 상황이 이어질 수 있다. 한국원자력안전재단의 경우도 비슷하다. 지난 2월 이사장으로 임명된 김제남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은 대표적 반핵·반원전 인사다. 한 친(親) 원전 단체가 김 이사장의 임명을 두고 “보신탕집 주방장이 애견협회 회장이 된 격”이라고 비꼬았을 정도다. 임기 2025년 2월을 채울 경우, 윤석열 정부의 탈원전 폐기 기조와 마찰을 일으킬 우려마저 나온다.

엽관주의와 실적주의

신·구 권력의 인사권 갈등은 피할 수 없을까. 인사행정의 대립 항인 ‘엽관주의’와 ‘실적주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엽관제(獵官制·spoils system)란 정권을 잡은 정당이 공직을 그 정당에 봉사한 대가로 분배하는 인사 관행을 말한다. 정당 정치가 발달한 영·미에서 시작됐지만, 관료제와 행정이 점점 전문화되면서 점차 실적제(merit system)로 넘어오게 됐다. 효율적 관료제를 중시하는 한국에선 집권 세력의 ‘논공행상’ 행태에 부정적 시각이 특히 강하다. 언론의 정부 인사에 대한 비판의 단골 주제는 ‘낙하산 인사’다. 정권 교체에 따른 국가 작용의 중단과 혼란을 예방하고 일관성 있는 공무 수행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해 직업 공무원 제도를 강조한다.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 정치에서 엽관제는 과연 부정적이기만 할까. ‘자리를 사냥한다’는 어감이 좋지는 않지만, 엽관제가 민주주의의 요체인 ‘반응성’과 ‘책임성’에 부합하는 측면을 무시하기 힘들다. 선거 공약이나 정책 실현을 위해 ‘국정 철학을 공유하는 사람’을 쓰는 것이 일정 정도 불가피하다. ‘어공’이라 불리는 정무직 공무원이 그런 경우다. 정치권력의 입장에선 선거 기여도에 따른 보상을 현실적으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임재진 서울시립대 행정학 교수는 “공공기관 낙하산 근절 자체가 어쩌면 ‘열반 오류’일지 모른다”고 지적한다. ‘열반 오류’란 실현 불가능한 이상을 준거로 두고 현실을 무리하게 뜯어고치려는 시도를 말한다. 역대 모든 정권이 “낙하산 인사는 없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사실 불가능한 목표다. 각종 법적·제도적 장치를 두지만, 지켜지지 않을 ‘상징적 수사’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차라리 ‘정치적 임용’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임용 절차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임 교수 주장의 요지다. (2017년 한국인사행정학회보 ‘공공기관 임원 임용제도 개선방안’)

제도-현실 괴리가 권력 무리수 불러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공운법)은 공공기관장 임기는 3년, 임원은 2년으로 규정한다. 공공기관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높이려는 취지다. 그러나 5년마다 정치권력이 ‘리셋’되는 현실과 상충한다. 이런 상황은 ‘공공기관 물갈이’ 같은 권력의 무리수를 낳곤 한다. 문재인 정부의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이 그랬다. 산하 공공기관에 청와대가 원하는 인사를 앉히기 위해 기존 임원에게 사표를 강요한 혐의로 김은경 전 장관과 신미숙 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이 지난 1월 대법원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부정적 관행에 경종을 울린 판결이다. 그러나 새 정부 입장에선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고 의욕적인 국정 출발을 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제도와 현실의 괴리를 좁히기 위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공공기관장과 대통령의 임기를 연계할 필요가 있다. 공공기관은 제한된 공적 재화 및 서비스를 국민에 제공하는 곳이다. 사업 순위와 자원 배분에서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과 공공기관의 임기를 따로 놀아서는 5년 단임 대통령제의 책임 정치가 구현되기 어렵다.

구체적 방법으로는 대통령 임기 시작과 함께 3년을 보장한 뒤 1년 단위로 연장하는 방안, 연임을 전제로 2.5년으로 하는 방안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실제로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이 터진 뒤 정치권과 행정학계, 공무원 노조 일각에서 이 문제가 반짝 논의된 적이 있으나 흐지부지됐다.

물론 모든 공공기관과 임원이 임기 연계의 대상이 되긴 어렵다. 특히 고도의 독립성이 요구되는 감사직의 경우 대통령 임기와 상관없이 임기를 보장해야 한다. 공운법은 공공기관을 공기업, 준정부기관, 기타공공기관으로 구분한다. 공기업은 다시 시장형·준시장형으로, 준정부기관은 기금관리형·위탁집행형으로 나뉜다. 공공기관의 성격·규모·목적 등에 따라 적용 대상과 구체적 방법을 국회에서 정해야 한다.

‘제대로 된 낙하산’이 필요하다

공공기관장의 정치적 임용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 말이 조직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훼손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기관의 특성과 전문성을 살리는 공정하고 투명한 인사 절차가 필요하다. 낙하산이 오더라도 제대로 된 낙하산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를 위해 요식 절차에 그치는 임원추천위원회(임추위)와 공공기관운영위원회(공운위)부터 투명화·내실화해야 한다.

임추위는 구성부터 독립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구조다. 임추위는 ‘해당 기관의 비상임이사+이사회가 선임한 위원’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비상임이사는 애초 기획재정부 장관 혹은 주무부처 장관이 임명하는 사람들이다. 이사회도 과반수는 이들 비상임이사로 구성된다. 이사회가 선임하는 외부인사가 정부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들다. 공공기관의 관리 감독 성격을 지닌 공운위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공운위는 ‘민간위원+공무원’으로 구성되는데, 이 민간위원은 기재부 장관의 추천으로 대통령이 위촉한다. 독립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구조다.

투명성도 문제다. 임추위나 공운위의 회의록은 제대로 공개되지 않는다. 공개하면 위원들의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힘들어진다는 이유에서다. 이래서는 ‘깜깜이 임용’이라는 논란을 벗어나기 어렵다.

임추위 비상임 이사의 비율을 줄이고, 내부 직원 대표나 국회 추천 인사를 참여하게 하는 등 개선책이 필요하다. 미국 연방정부의 ‘플럼북(plum book)’처럼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 직책을 명시하고, 해당 직위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격 요건 및 임명된 인사의 정보를 공개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낙하산 근절과 공정한 인사라는 포장을 친 채 언제까지 ‘눈 가리고 아웅’ 식 공공기관 인사를 되풀이할 것인가. 솔직하게 문제를 드러내놓고 현실 적용 가능한 개선책을 찾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