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안혜리의 시선

속이더니 버렸다, 정부가 국민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통화기록을 보니 지난 2월 21일이었다. 한 의사 지인과 통화하다 이상한 얘기를 들었다. 먹는 코로나 19 치료제인 팍스로비드를 처방하려 했으나 보건소에서 "강남엔 지금 단 한 개도 없다"고 했다는 거다. 믿기 어려웠다. 마침 이날은 중앙방역대책본부(방대본, 질병관리청)가 팍스로비드 처방 대상을 40대 기저 질환자로 확대한 첫날이었다. 앞서 방대본은 지난 1월 65세 이상 고령층을 대상으로 팍스로비드를 처음 도입한 이후 순차적으로 60세 이상, 50대 이상 기저질환자로 처방을 확대했다고 열심히 홍보하고 있었다. 정부가 공식 보도자료와 브리핑으로 연일 처방 확대를 자랑하는데, 환자가 약 구하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의사가 처방할 약이 없다고?

김부겸 총리가 23일 중대본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정부는 또 "앞으로 1~2주가 전환점"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100만명분 확보했다던 치료제는 시중에서 볼 수도 없다. 뉴시스

김부겸 총리가 23일 중대본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정부는 또 "앞으로 1~2주가 전환점"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100만명분 확보했다던 치료제는 시중에서 볼 수도 없다. 뉴시스

무슨 일인가 싶어 검색을 해봤다. 어디에도 약이 부족하다는 뉴스는 없었다. 대신 지난해 11월 "40만4000명분의 치료제 선 구매 계약을 곧 완료한다"는 발표를 시작으로 류근혁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제1총괄조정관(복지부 2차관)이 지난 1월 12일 "정부가 총 100만 4000명분(팍스로비드는 76만2000명분)의 구매계약을 체결했다"고 한 브리핑이 눈에 띄었다. 이후 '약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물류창고에 옮겨졌다, 누구누구가 처방을 받았다, 효과가 좋다'는 등 모든 게 순조롭다는 얘기뿐이었다. 간간히 '처방 수가 너무 적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지만 약 수급 부족을 지목한 건 없었다. '신약이라 부작용을 우려해 환자가 처방받기를 거부한다, 수가가 낮고 관리가 까다로워 의사가 처방하기를 꺼린다'는 식으로 환자와 의료진 탓을 하는 정부의 일방적 주장이 담긴 내용뿐이었다. 일반 국민 머릿속에 '100만명분의 약이 있구나,  내가 원하면 언제든 이 약으로 치료받을 수 있겠구나'라는 희망이 주입될 수밖에 없었다. 대선 전(3월 9일)엔 이랬다. 정부의 의도된 거짓말이든, 현장을 제대로 파악 못 한 무능이든 이유 불문 이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평범한 국민이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청와대는 지난 20일 문재인정부 5년 국정운영 결과를 담은 백서를 공개했다. 코로나 19 누적 사망자가 1만3000명이 넘었는데 "세계가 감탄한 K방역"이라고 자화자찬했다. [사진 청와대]

청와대는 지난 20일 문재인정부 5년 국정운영 결과를 담은 백서를 공개했다. 코로나 19 누적 사망자가 1만3000명이 넘었는데 "세계가 감탄한 K방역"이라고 자화자찬했다. [사진 청와대]

보수-진보 10년 집권 교체주기를 깨고 5년 만에 정권을 내준 문재인 정부는 코로나와 관련해 손을 놓아버리다시피 했고,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방역 얘기가 아니라 치료 얘기다. 10만명 수준(2월 21일)이던 하루 확진자 수는 대선 전날 30만명을 돌파해 62만명(3월 16일)까지, 58명이던 사망자 수 역시 같은 날 429명까지 치솟았다. 정부는 "재택치료"라며 고위험군은 특별 관리한다고 했지만, 실제론 증상 없이 지나가는 건장한 청년이든 급속히 증상이 악화할 위험이 큰 고령의 기저 질환자든 상관없이 사실상 재택방치를 했다. 100만명분이나 확보했다고 자랑하던 팍스로비드 처방이 원활하기는커녕 고령의 고위험군 환자가 보건소의 진료 안내 문자 하나 못 받은 채 팍스로비드 처방 가능 시점인 증상 발현 후 5일을 넘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갑자기 증세가 악화해 무서운 마음에 전화를 걸어보면 보건소는 늘 통화 중, 코로나 치료 병원은 대기 몇 시간이 예사라는 증언이 주변에 넘쳐난다.
여러 논란이 있고 전문가들조차 각기 생각이 다르지만 난 방역 완화라는 큰 방향은 동의하는 편이다. 하지만 방역 완화가 치료 포기는 아니다. 둘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그런데 지금 정부는 2년 넘게 '방역'을 빌미로 국민에 대한 인권 침해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놓고선 정작 치료제 확보 등 정부의 역할이 필요한 지금은 나 몰라라 하는 중이다.
그렇게 코로나 발생 794일 만에 누적 확진자 1000만 시대를 맞았다. 치료약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올해 들어서만 7869명이 코로나로 세상을 떠났다. 감당할 수 있는 의료체계를 넘어서는 확진자 수 폭증에 각자도생이 기본인 시대가 됐다지만 팍스로비드는 구경도 못하고 동네 약국마다 해열제와 감기약이 품절인 상황에 맞닥뜨리다 보니 공허한 외침인 줄 알면서도 대체 정부는 어디에 있는지, 지난 2년여 동안 뭘 했는지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처방을 어렵게 하는 꼼수로 100만명 분이 아닌 지금까지 '실제로' 도입한 16만7000명분의 팍스로비드 중 10만명분만 소진했다. 수급 문제를 지적하면 "아직 재고 6만명분이 남아 있다"고 항변한다. 하루 확진 62만명 기준으로 딱 하루면 처방이 끝날 분량이다.
화는 나지만 사실 놀랍지는 않다. 코로나 발병 첫해 마스크 대란, 지난해의 백신 수급 문제…. 이미 다 겪은 일이다. 언제나 판단은 미숙했고, 말만 앞세워 혹세무민했으며, 그래서 국민이 필요한 마스크든 백신이든 치료제든 한 번도 제때 국민 손에 쥐어주지 못했다. 아무도 책임지거나 사과하지도 않았다. 우리 국민 목숨값이 이렇게 하찮은 것인가. 누구라도 그렇지 않다고,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치료제 100만 확보 홍보하더니 #실제론 못 구해 고위험군 방치 #정치방역 뒤 치료포기 책임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