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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지 않을 권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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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종훈 기자 중앙일보 기자
정종훈 사회정책팀 기자

정종훈 사회정책팀 기자

“첫 번째, 숨이 딸려 운동을 대부분 잘 못 합니다… 다섯 번째, 병원에 너무 자주 가서 학교에 빠지게 됩니다… 일곱 번째, 살이 없어서 주사를 놓을 때 여러 번 찌르는 경우가 많아 무척이나 아픕니다. (중략) 그런데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습니다. 저와 같이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박준석(15)군이 쓴 『내가 하고 싶은 여덟 가지』라는 책의 일부다. 박군의 또 다른 이름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어린 시절 일상 속 화학제품이 온몸의 장기를 망가트렸다. 비극은 아무도 모르는 새 찾아와, 평생 자신을 규정하는 꼬리표가 됐다. 그와 같은 이들이 7666명(피해 구제 신청 기준)에 달한다.

한동안 기억에서 잊힌 수많은 ‘박군’들이 소환됐다. 2011년 참사가 처음 알려진 지 11년 만에 대규모 조정안이 나와서다. 그동안 많은 이가 목숨을 잃거나, 중증으로 악화했다. 언제 나빠질지 몰라 걱정하는 이도 많다. 이들에게 늦게나마 기업들이 조정액을 지급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알려진 지 10년을 맞은 지난해 8월 30일, 서울 시내에서 피해자 구제 및 배보상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촛불 집회가 열렸다. [뉴스1]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알려진 지 10년을 맞은 지난해 8월 30일, 서울 시내에서 피해자 구제 및 배보상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촛불 집회가 열렸다. [뉴스1]

피해자 상황과 연령·증상이 워낙 다양해 그들이 조정안을 보는 시각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한 가지는 같다. ‘이대로 잊힐 수 없다’는 목소리다. 기업·정부의 책임 인정과 진정한 사과 없이 단 한 번 합의로 오랜 고통이 묻힐까 두렵다. 한 피해자는 “사람들에게 빠르게 잊히면 지금껏 풀리지 않은 참사의 완전한 해결은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조정 후에도 철저한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가 남았다”라고 했다.

안희주씨는 올 초 1인 시위에 뛰어들었다. 온몸이 굳어가는 동생 안은주(54)씨를 대신한 외침이다. 그는 “많은 사람은 피해자들이 보상받고 다 끝난 줄 알고 있다”며 씁쓸해했다. 그 후 언론 보도가 이어지자 휴대전화 너머 목소리가 밝아졌다. “기사가 나오니 촌에서도 사람들이 가습기 살균제 이야기를 하네요. 주변 친구들도 전화 와서 ‘그런 줄 몰랐다’ 하고….”

사회적 참사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집에서, 바다에서, 공사장에서 평범한 이웃들이 고통을 겪는다. 참사 직후 들끓었던 여론이 차분해지면 ‘과거는 잊고 미래로 가자’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하지만 잊고 싶은 과거를 겪은 당사자들은 잊히지 않길 원한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도 잊히지 않으려 10년 넘게 버텨왔다.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기억해주는 것이다. 박군이 굳이 얼굴을 드러내고 책을 펴낸 것도 그 때문이다. 어머니 추준영씨의 말이다. “맨날 우는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꿈을 위해 사회적 아픔을 딛고 나아가는 아이가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