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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세에 감독 데뷔 천명관 작가 "시대착오? 구원 못 받는 남자들 그렸죠"

중앙일보

입력

건달 영화 '뜨거운 피'(23일 개봉)로 감독 데뷔한 소설가 천명관(58)을 18일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사진 키다리스튜디오]

건달 영화 '뜨거운 피'(23일 개봉)로 감독 데뷔한 소설가 천명관(58)을 18일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사진 키다리스튜디오]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서 심판받는 심정이죠.”
범죄 누아르 ‘뜨거운 피’로 영화감독에 데뷔한 천명관(58) 작가가 개봉(23일)을 앞둔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30대에 충무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며 감독 데뷔를 목표한 지 30년 만이다. 그 사이 소설가로 더 유명해졌다. 2003년 첫 단편 『프랭크와 나』, 이듬해 장편 『고래』, 2010년 『고령화 가족』 등으로 평단‧대중을 사로잡았다.

소설가 천명관 영화감독 데뷔 #23일 개봉 영화 ‘뜨거운 피’

‘뜨거운 피’는 김언수 작가의 동명 소설(2016)이 토대다. 김 작가가 천 감독에게 직접 연출을 제안하며 영화화됐다. 지난 18일 화상 인터뷰로 만난 천 감독은 “‘마침내 꿈을 이뤘다’고 표현하는 분도 있던데, 꿈은 젊을 때 꾸는 거다. 지금 나이에 무슨 꿈을 꾸겠냐”고 말하며 웃었다. “30대 땐 내 삶이 너무 누추했으니까 감독이 칸영화제 레드카펫도 서고, 근사해 보여서 하겠다고 한 거죠.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역량도 부족했어요. 소설을 써서 다행히 밥벌이할 수 있었는데 게으르게 작가 생활을 하다 보니 영화 만들 기회가 왔네요.”

틀을 깬 작가 천명관의 익숙한 누아르 영화

『뜨거운 피』는 그가 집필 과정부터 알고 있던 작품이다. 소설의 첫 문장 ‘구암의 건달들은 아무도 양복을 입지 않는다’를 그가 제안했다. 그럼에도 처음엔 연출 제안에 어리둥절했단다. “제 소설로 영화 데뷔를 하려고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2016)를 쓰고 있는데 『뜨거운 피』가 먼저 나왔어요. 저보고 영화 연출을 해달래서 이런 이야기에 능한 감독들한테 보내라고 거절했죠. 그런데 제가 이 이야기를 가장 잘 이해하고 구현할 수 있을 거라더군요. 소설을 다 읽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저만의 이미지가 그려졌죠.”

‘뜨거운 피’는 1993년 부산 변두리의 가상 포구 ‘구암’의 실세 손 영감(김갑수)과 오른팔 희수(정우)를 둘러싼 밑바닥 건달들의 생존 분투를 그린 작품이다. 원작이 중국산 고춧가루를 속여 파는 생계형 건달 손 영감의 세계를 공들여 묘사하며 기존 ‘폼생폼사’ 건달들과 다른 시선으로 출발했다면, 영화는 범죄 누아르의 보다 익숙한 풍경으로 문을 연다.
손 영감을 아버지처럼 따랐던 고아 희수가 자기 아들 같은 존재를 얻게 되는 사연이 감정을 건드리지만, 회칼 난무하는 살인 장면들이 이런 드라마를 압도한다. 16일 언론 시사 후엔 “새로울 것 없는 건달 영화”란 평가가 나왔다. 소설로는 “기존 틀로 해석할 수 없는”(은희경 작가) 새로운 작가로 주목받았던 그로선 아쉬움이 남는다.

"새로움 중요치 않아. 누아르 문법 충실"

원작의 많은 등장인물을 최대한 살리려다 보니 세부 묘사가 영화에선 다소 밋밋해졌다. 희수가 권력 암투에 휘말리는 과정도 군데군데 장면이 편집된 듯 맥락이 끊긴다. “원작을 다 담으려면 10부작 정도 돼야 할 것”이라는 천 감독은 “영화는 생략과 포기의 과정이었다. 찍어놓은 3시간 반 가량 분량을 2시간 안에 담아내야 했다. 개인적으로 주변 인물들에 더 흥미가 있었고 촘촘히 묘사하고 싶었는데 결과적으로 주인공 희수를 중심으로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전개하다 보니 거칠게 축약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면서 “마지막까지 고민한 건 지루함 없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느냐의 문제였다”고 말했다.

소설가 천명관의 감독 데뷔작인 영화 '뜨거운 피'(23일 개봉)는 1993년 부산 변두리 포구 ‘구암’의 실세 ‘희수’(정우)와 밑바닥 건달들의 치열한 생존 싸움을 그린다. 느와르의 대가 김언수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사진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키다리스튜디오]

소설가 천명관의 감독 데뷔작인 영화 '뜨거운 피'(23일 개봉)는 1993년 부산 변두리 포구 ‘구암’의 실세 ‘희수’(정우)와 밑바닥 건달들의 치열한 생존 싸움을 그린다. 느와르의 대가 김언수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사진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키다리스튜디오]

그는 또 “새로움이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누아르 문법에 충실하려 했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갱스터 마피아 누아르를 좋아했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도 평생 마피아 이야기를 다루면서 구원이란 테마를 그려왔다”면서 “‘뜨거운 피’도 폼 잡는 조폭이 아니라 치열하게 자기 밑바닥에서 살아남으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손에 쥔 게 없는 쓸쓸한 이야기다. 결국 구원을 꿈꾸지만 구원받지 못하는 이야기가 제가 생각하는 누아르”라고 말했다.

"시대착오? 바보 같은 남자들의 역설이죠"

또 “언어가 인류의 역사가 응축된 알맹이라면 영상은 뉘앙스이고 분위기”라고 비교했다. “영화는 시나리오가 한 40%이고 촬영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60%가 이뤄진다. 완전히 또 다른 창작의 과정이다. 예측하지 않았던 것들이 계속 나타났다”고 첫 연출 경험을 돌아봤다.
또 “이번 작품은 사실 저의 세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언수 작가가 만든 세계이고, 원작자가 하려고 한 이야기가 뭘지 끝없이 고민했죠. 연기는 배우가 하고 촬영감독·음악감독이 있으니까 제가 별로 한 게 없다는 기분이 들 때도 있지만, 나름대로는 기술적으로 누아르란 장르를 잘 구현하려고 노력했어요. ‘뻘짓거리’를 하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은 들죠. 다음엔 제 이야기를 해야죠.”

영화 '뜨거운 피'는 부산 변두리 가상 항구 '구암'이 무대다. 김갑수를 제외하고 주연 정우, 최무성, 지승현 등 실제 경상도 출신 배우들이 출연해 사투리 연기를 선보인다.  [사진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키다리스튜디오]

영화 '뜨거운 피'는 부산 변두리 가상 항구 '구암'이 무대다. 김갑수를 제외하고 주연 정우, 최무성, 지승현 등 실제 경상도 출신 배우들이 출연해 사투리 연기를 선보인다. [사진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키다리스튜디오]

그는 요즘 자신의 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의 영화 시나리오 마무리에 한창이다. 인천의 노회한 조폭 두목과 삼류인생들의 소동을 그린 블랙 코미디로 직접 연출을 맡을 계획이다. 천 감독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제가 그냥 그쪽을 잘 알기 때문”이라면서 “재벌 2세나 엘리트는 잘 모르니까 쓸 수가 없다. 제 주변 친구들은 어릴 때부터 다 공장 다니고 지금도 농사짓고 산다”고 했다. “이 소설이 처음 나왔을 때 ‘시대가 어느 때인데 제목이 이게 뭐냐’고 비난을 받았어요. 근데 책을 읽어보면 역설이거든요. 이 남자들이 얼마나 황당하고 바보 같고 어리석고 유치하고 지질한가에 관한 이야기죠. ‘뜨거운 피’가 정통 록이라면 이 작품은 얼터너티브 록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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