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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염재호 칼럼

선출된 권력의 겸손과 민주주의의 상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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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제20대 대선이 막을 내렸다. 역대 최악의 비호감 대선으로 네거티브 유세와 극도로 양분된 대선 레이스에서 겨우 0.73%포인트의 차이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승리를 얻었다. 이는 무효표 30만 7542표보다도 적은 24만 7077표로 승패가 나뉘어진 결과였다.

선거 패배로 더불어민주당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윤호중 원내대표와 젊은 여성 박지현 n번방추적단불꽃 활동가를 공동비대위원장으로 선임했다. 대선 전후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11주 연속 40% 이상이고, 여당 이재명 후보의 개인기는 다른 후보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더불어민주당은 왜 대선에서 패했나?

상식을 무시할 때 실패는 찾아와
삼권분립은 대통령제의 기본 상식
중도층 마음은 상식으로 잡아야
겸손과 상식의 윤석열 정부 되길

조직면에서도 국민의힘은 더불어민주당에 턱없이 열세인 상황이었다. 국민의힘 대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35.9% 대 58.3%, 광역단체장은 28.6% 대 58.8%, 기초단체장은 25.6% 대 66.8%, 광역의원은 17.8% 대 77.4%, 기초의원은 35.8% 대 53.7% 였다. 게다가 시민단체, 여성단체, 전교조, 민노총 등 조직화된 지지세력이 막강한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대선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는 객관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성공은 종종 실패의 원인을 제공한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으로 타임지에 선정된 마케팅 전문가 마틴 린드스트롬(Martin Lindstrom)은 작년에 펴낸 신작 『고장난 회사들(The Ministry of Common Sense)』에서 왜 성공하는 대기업 조직들이 실패를 거듭하는지 예리하게 분석했다. 원서 제목에서 말해주듯 핵심은 성공한 조직들이 종종 기본적 상식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규칙만 앞세우며 오만했던 유나이티드 항공 보안요원이 69세 베트남계 미국의사를 강제로 끌어내린 사건, 재택근무를 수시로 체크하기 위해 끝없이 이어지는 화상회의, 고객의 문의를 오히려 어렵게 만드는 ARS 서비스, 호텔객실에서 TV나 에어콘 작동이 지나치게 복잡하여 고생하던 일 등의 사례를 분석한다.

우리는 종종 백화점 직원의 지나친 서비스 때문에 쇼핑을 편히 즐기지 못하거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음식이 나올 때마다 친절한 설명을 듣느라고 대화가 끊기는 불편함을 경험한다. 조직에서는 당연히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고객의 입장에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경우가 많다. 과유불급의 상식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검찰개혁, 부동산 정책, 중국과 북한외교, 코로나백신 대응 등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고객인 국민을 불편하게 만든 것은 없었는지, 공공기관, 재외공관 등 엽관제적 임명이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것은 없었는지, 전문가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정책 때문에 실패를 거듭한 것은 없었는지? 건전한 상식의 내부 비판도 배신자라고 공격하는 분위기는 집권세력의 거침없는 오만함으로 비쳐졌다. 여당은 선거 막판에 부랴부랴 유권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사과도 하고 새로운 공약도 제시했지만 신뢰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과욕에 국정운영을 너무 성급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문재인 정부는 여당 의원들을 대거 장관으로 임명하여 역대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 의원내각제도 아닌데 현재 김부겸 총리 외에 18명의 장관 중 8명이 여당의원 출신이다. 총리 세 명도 모두 여당 국회의원 출신이었다. 사법부 인사의 임명에 정치적 편향성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다. 대통령제 하에서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분립 원칙은 상식이다. 감사원, 선거관리위원회 등 공정성을 담보해야 할 직책에 친 정부 인사 임명 강행으로 논란을 빚은 것도 기존 상식을 뒤엎는 것이다. 게다가 여당 국회의원들이 행정의 전문성을 무시한 채 자신들은 선출된 권력이라고 임명직 장관을 몰아치는 일도 흔했다. 선출된 권력의 역할은 오만한 강압이 아니라 합리적인 논의로 설득하여 정치력을 발휘하는 것이 상식이다.

선출된 권력은 국정을 운영하는 많은 축 중의 하나이다. 대선 과정에서 대통령이 되면 온갖 것을 해줄 수 있다는 약속은 국민을 호도하는 상식 밖의 일이다. 선출된 대통령은 왕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합리적 과정이기 때문에 대통령도 절제와 겸손의 미덕을 보여야 한다. 옛날 왕이 언로가 막힌 억울한 백성을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듯 국민청원제도를 운영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SNS정치도 직접민주주의의 보완적 기능에 그쳐야지 과도하게 되면 대의정치와 정당정치를 뛰어넘어 선동정치로 빠지게 된다.

국회와 행정부를 통해 국민의 여론이 전달되고 이를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대의 민주정치의 기본 상식이다. 상식을 소홀히 하는 대통령과 정부는 지지층의 열렬한 응원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모든 선거 결과를 좌우하는 중도층의 표심을 잡을 수는 없다. 대의민주주의의 꽃인 선출된 권력은 겸손히 국민의 마음을 읽어내야 한다. 새로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도 이를 명심했으면 좋겠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