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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왕(王)’에 깃든 시대정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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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사회2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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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적 대통령제를 내려놓는 방식이 제왕적이다.”

‘용산 대통령’이 선포된 자리에서 이런 역설이 던져졌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도 제왕적 방식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결단하지 않으면 벗어나기 어렵다”는 비장함을 내비치면서다. 첫 국정 과제를 내놓은 이 장면이 윤석열 정부가 끝까지 안고 가야 할 화두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역설의 화두. 그것은 윤석열 정부 앞에 놓인 가시밭길을 예고하고 있다. 새 정부의 목표가 ‘통합’이라는 점에서 더 그렇다. ‘모순적인 진리’가 횡행하는 시대에, 합칠 생각도 없는 상대와 통합을 한다? 이 고단해 보이는 패러독스가 혹시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정신일까. 아, 시작부터 피곤한 민주주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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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역설은 눈앞에 도열하고 있다. ‘역대 최고 득표 낙선인’이 탄생했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47.83%의 국민은 0.73%포인트 차이의 패배를 아직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그래서인지 임기가 두 달도 안 남은 대통령이 안보 현실을 내세우며 당선인의 포부에 찬물을 끼얹었다. 5년간 안보와 담을 쌓던 그가 이제 와서…. 이 또한 ‘끝에서 시작을 찾는’ 정치판의 역설이다.

윤 당선인의 발자취도 역설로 점철됐다. 보수 적폐에 칼을 겨눴던 검사였고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었던 서사는 이제 식상하다. 그것보다는 선거 과정에 벌어진 ‘손바닥 왕’ 논란의 긴장감이 더 팽팽하다. 지지자들도 눈을 의심했던 ‘비호감 대선’의 한 장면이다. “그 글씨가 ‘백성 민(民)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던 국민의힘 당직자의 한숨이 기억난다.

당시 윤 당선인은 “지지자의 응원 개념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초심자의 불찰이며, 차에서 닦았는데도 안 지워지더라”라며 멋쩍게 사과했다. 그러나 그가 제왕적 대통령제와 역사적 대결에 나섰다는 점에서 6개월 전의 손바닥은 다시 거론돼야 한다. 청와대를 떠나 소통의 역사를 새로 쓰기로 했다면 그 손바닥은 양지로 나와야 한다. 스탠딩 개그맨의 손바닥에도 왕 자(字)가 다시 쓰일 수 있어야 한다.

민주공화제라는 시스템을 한 방에 무너뜨릴 위험성을 내포한 그 글자는 음지에 둘수록 기이한 변이를 할 공산이 크다. 터무니없는 무속의 뿌리가 되거나, ‘더 킹’의 특수부장 정우성을 환생시킬 수도 있다. 조국의 내로남불처럼 국민의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다.

본의 아니게 국민의 트라우마를 만든 것이라면, 손바닥 왕을 역설과 반전의 시대정신으로 승화시키길 희망한다. 작은 글씨가 준 생각보다 큰 상처를 용산 대통령의 시대엔 간과하지 않겠다는 사명감으로 무장하길 바란다. 제왕의 시대를 종식할 국민과의 소통은 그때부터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