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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역지사지(歷知思志)

창덕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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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유성운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이 집(창덕궁)은 이궁(離宮)이라 비록 좁더라도 좋다. 만약 대사(大事)가 있다면 경복궁으로 나아가겠다.” (『태종실록』 17년 윤오월 12일)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이 좁다며 재공사가 필요하다는 요청에 태종(이방원)은 단박에 거절했다. 공사 때문에 경복궁에서 머무는 것이 싫었다.

이방원은 경복궁을 꺼렸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그는 경복궁을 버리고 개경 환도(還都)를 강행했다. 왕위에 오른 뒤 한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경복궁엔 가지 않았다. 대신 창덕궁을 짓게 했다. 한양 천도와 경복궁 건립 등으로 백성의 수고가 많았다는 반대 의견이 빗발쳤다. 최측근 하륜과 조영무도 만류했지만 듣지 않았다. 한양에 돌아왔는데, 창덕궁이 완공되지 않자 조준의 집에 머물렀다. 그 정도로 경복궁을 기피했다.

역지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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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랬을까. 학계에선 왕자의 난이 일어난 무대였고, 정적인 정도전이 경복궁 공사를 주도했던 점이 이유였을 거라고 본다. 부왕의 결정을 뒤집고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으니, 새 질서를 상징하는 공간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이후에도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지만, 실제 정사는 대부분 창덕궁에서 이뤄졌다. 대원군이 실추된 왕권을 되살린다며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그랬다.

지도자는 공간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는 모양이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경무대를 청와대로 바꿨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청남대를 개방했다. 윤석열 당선자의 용산행은 훗날 어떻게 평가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