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흑과 백으로 나뉜 종교내전 트라우마, 흑백영화에 담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6면

영화 ‘벨파스트’에서 감독의 분신인 버디(주드 힐)와 아버지(제이미 도넌). 영화는 대부분 영국에 세트를 지어 찍었지만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도 일부 촬영했다. [사진 유니버설 픽쳐스]

영화 ‘벨파스트’에서 감독의 분신인 버디(주드 힐)와 아버지(제이미 도넌). 영화는 대부분 영국에 세트를 지어 찍었지만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도 일부 촬영했다. [사진 유니버설 픽쳐스]

“폭력은 결코 해답이 될 수 없죠. 그 답은 항상 대화여야 합니다.”

영국의 배우 겸 감독 케네스 브래너(62)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분열이 심화한 국제정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영화 ‘벨파스트’의 한국 개봉(23일)에 앞두고서 지난 2일 그를 전화 인터뷰했다. 그는 어린 시절 고향 북아일랜드 수도 벨파스트에서 겪은 종교 내전의 상흔을 영화에 담았다. “벨파스트 분쟁은 30년간 3700명의 사망자를 낳았고, 휘청거리는 평화가 이어졌다”고 돌이킨 그는 “영화에도 나오듯 ‘우리 편이거나 적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태도는 해답이 될 수 없다. 인간의 행동과 국가 간 관계는 그보다 복잡하다”며 “폭력이 앞서면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받는데 그건 불공평하다”고 했다.

브래너는 영국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과 할리우드를 오가며 ‘헨리 5세’ ‘햄릿’ 등 고전과 ‘덩케르크’ ‘테넷’ ‘나일강의 죽음’ 등 블록버스터를 넘나들었다. ‘벨파스트’의 각본·연출·제작을 맡아 처음으로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냈다. 1969년 벨파스트에서 발발한 개신교·천주교 간 폭력사태로 그의 가족은 영국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영화는 그의 분신인 9살 소년 버디(주드 힐)의 눈높이로 이 상황을 그린다.

버디에게 벨파스트는 세상의 전부다. 그날도 버디는 골목에서 나무칼을 휘두르며 용을 무찌르고 있었다. 이웃과 인사하던 순간 화염이 치솟았다. 창문이 깨지고 자동차가 폭발했다. 엄마는 애타게 버디를 불렀다. “이 영화는 진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진술이죠. 지난 50여년간 나는 그렇게 벨파스트를 떠난 것이 얼마나 트라우마가 됐는지를 과소평가했어요. 벨파스트를 탈출하는 동안 많은 것을 잃었죠. 정체성까지도요.”

케네스 브래너 감독이 촬영 당시 현장에서 카메라 모니터를 보고 있다. [사진 유니버설 픽쳐스]

케네스 브래너 감독이 촬영 당시 현장에서 카메라 모니터를 보고 있다. [사진 유니버설 픽쳐스]

영화를 흑백으로 찍은 이유는.
“흑백 영상에는 시(詩)가 담겨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고전 영화 ‘자전거 도둑’의 흑백 이미지에선 진정성이 느껴진다. 흑백은 때로 사람들의 영혼을 더 잘 보여준다. 이 영화는 일종의 꿈 같은 이야기고 꿈에는 흑백이 더 잘 어울린다.”
버디가 가족과 보는 극 중 영화·연극은 컬러다.
“내 기억 속 벨파스트는 남성적이고 회색빛 모노톤 도시였지만, 극장에서 만난 ‘컬러(영화)’가 우리 삶에 침입했다. 컬러는 탈출의 언어였다. 이야기의 언어, 세계의 언어였다. 전기충격 같은 매력이었다. 영화 관람은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아했던 의식이고 벨파스트의 실생활과 대조를 이뤘다. 내가 궁극적으로 예술의, 그 ‘컬러’의 일부가 될 수 있게 해준 어린 시절의 무수한 경험이 감사할 뿐이다.”
계속 벨파스트에 살았다면 달랐을까.
“더 일찍 작가가 됐을지도 모른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노래와 시를 사랑하고, 그런 전통에 나는 완전히 매료됐을 테니까.”

영화에서 어설프게 과자를 훔치려다 잡혀 경찰서까지 갔던 장면도 실화가 바탕이다. 친구도 종교가 같아야 사귈 수 있는 건지 심각한 고민에 빠진 버디를, 12살 신예 주드 힐이 섬세하게 연기했다. 오디션에서 300대 1 경쟁을 뚫고 발탁됐다.

주연 배우는 모두 아일랜드 출신이다. 버디의 할아버지 역 시아란 힌즈는 브래너 감독 가족과 지척에 살았던 한동네 출신이었다. 당시엔 종교가 달라 섞이지 못했는데, 이번엔 한뜻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할머니 역의 주디 덴치는 오는 27일(미국 현지 시간) 배우 윤여정이 시상자로 나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부문 후보다. ‘벨파스트’는 작품상·감독상·각본상 등 아카데미 7개 부문 후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