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우크라이나 여군 올가 세미디아노바(48)가 최전선에서 싸우다 배에 치명적인 총상을 입고 숨졌습니다. 세미디아노바는 열두 자녀의 엄마였는데, 여섯 명은 입양한 아이들이었죠. 대가족을 품은 엄마였지만 용감한 군인이기도 했습니다. 2014년 우크라이나 돈바스 전쟁 초기부터 치열하게 전투를 치러왔다고 합니다.
[정글]
전쟁이 터지면 사무실 건물이 군사기지가 되고, 평범한 월급쟁이가 부대 지휘관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이 기사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건 우크라이나 여성들에 대해서입니다. ‘여성과 아이는 피신하고 남성은 총을 든다’라고만 생각하기 쉽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상당히 많은 여성이 직접 전장에 뛰어들어 남자와 똑같이 전투를 치러왔습니다.
39세 여성 이리나 세르게예바 준위는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한 마을에서 시민의용군 지휘관을 맡고 있습니다.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세르게예바 준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러시아가 침공하고 처음 며칠 동안 젊은 여성들이 정말 많이 지원했어요. 사실 그들은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전혀 모르죠. 들어보니 꽤 많은 애들이 좀 낭만적인 생각으로 지원했더라고요. 현실을 겪어보면 다 깨질 텐데.”
5년이 넘게 전장을 누비면서 깨달은 바가 많았을 테죠. 러시아 침공 뒤 애국심 하나로 달려온 수많은 여성에게서 그녀는 예전 자기 모습이 보이나 봅니다. 그녀도 전사한 올가 세미디아노바처럼 2014년부터 참전했습니다. 처음엔 시민의용군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2017년 우크라이나군과 정식 계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르게예바를 포함해 수많은 우크라 여성들은 실제 전투에 투입되더라도, 불과 5년 전인 2017년까지 ‘전투병’으로 대우받지는 못했습니다. 전투 병과에 속한 군인에게만 주는 혜택도 누리지 못했죠. 그래서 우크라이나에서는 여성 전투병을 '보이지 않는 부대'라 불렀습니다.
‘보이지 않는 부대’ 우크라이나 여군
안드리아나 수삭(34)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선정한 국민 영웅 중 한 명입니다. 2014년 돈바스 전쟁이 터지자 동부 지역 최전선으로 곧장 달려갔습니다. 2014년 5월부터 2015년 7월까지 기습 작전부대에 소속돼 분리주의 반군이 점령한 마을을 탈환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부대원이 거의 전멸하는 일도 종종 벌어졌습니다.
수삭은 임신 5개월이 될 때까지 전장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삭의 공식 병과는 전투병이 아닌 ‘재봉병’이었습니다. 재봉병은 군수물자나 군복을 수선·재봉하는 일을 맡는 병사입니다.
저격수인 율리아 마트비엔코(43) 역시 수삭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작전 때마다 동료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참호에 숨어 적군을 노려야 했지만, 그녀의 보직도 전투병이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우크라이나군은 여자를 그다지 반기지 않아요. 아쉽지만 사실이 그래요. 군에 와도 요리, 통신, 의료 같은 것만 할 수 있죠. 딴 건 못해요. 그런데도 저는 하고 싶은 걸 요구하고, 내가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했어요. 모든 여성은 조국을 지킬 권리가 있어요.”
2017년 전에는 우크라이나에서 공식적으로 전투 병과에 소속된 여군은 없었습니다. 실제로는 저격을 하고 유탄을 쏘고 전투를 치른다 해도 공식 문서엔 취사, 재봉, 청소, 회계 같은 병과로 기재되죠.
우크라이나군 입장에선 전투병 한 명이 아쉬우니 법에선 금지해놓았다 해도 여군을 현장에 투입했던 겁니다. 그런데 상황이 급하다고 몰래몰래 투입됐다기엔 너무나 많은 여성이 총을 들었습니다. 사실 ‘여성군인의 전투 금지’는 오래 전에 사문화된 거나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그들은 공식적으로 전투병이 아니었기에 사회적 인정도 받지 못했고, 참전 용사 혜택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싸웠는데 왜 정부가 이걸 감추려고만 하냐고 울분을 터뜨려왔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2017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보이지 않는 부대(Invisible Battalion)’에는 수삭과 같은 여성군인의 삶이 우크라이나 들판에서 전장을 바라보듯 생생히 기록돼 있습니다. 이 다큐는 우크라이나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각국의 필름 페스티벌에 초청돼 화제를 낳았습니다.
이 다큐가 나올 즈음 여성군인의 싸울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크게 일면서 법이 개정됐습니다. 여성의용군이 군과 정규 계약을 맺을 수 있게 됐고 전투 병과 등록도 가능해졌죠. 지금은 총 63개의 전투 병과가 여성에게 개방돼 있습니다. 2019년부터는 군 사관학교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자격으로 입학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여성 참전 용사들은 모든 전투 병과의 개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성은 출산해야… 전투는 금지” 소련의 성차별적 잔재
그럼, 왜 실제 전투를 치르는 여성군인을 전투 병과에 포함시키지 않았을까요. 구소련 시절부터 내려온 유구한 성차별적 제도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는 구소련에서 1991년 독립한 나라로 소련의 많은 전통과 법체계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역시 그중 하나였죠.
소련은 여성의 출산을 국가적 의무로 여겼던 나라입니다. 여성의 생식 기능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여성의 전투 참여를 금했습니다. 사실 소련에도 러시아 혁명 시절이었던 1917년, 여장부 마리아 보치카료바가 이끌던 ‘죽음의 여군대대’라는 게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선 나치가 ‘밤의 마녀’라고 부른 588 야간 폭격기 연대의 소련 여군들이 전투에서 활약했죠.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선 여성을 전투에서 배제하는 법령이 만들어져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지금의 러시아도 이런 소련의 성차별적 전통을 이어받아 군에서 여성 역할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는 군 밖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러시아는 한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령으로 450여개의 직업군에 여성들이 종사하는 것을 금했었습니다. 지금은 이 숫자를 100여개 정도로 줄이긴 했는데요, 지금도 채굴, 건설, 금속공, 소방, 용접 등의 업무를 여성이 할 수 없습니다. 러시아엔 전근대적 고정관념이 여전하죠. 사실 우리나라도 이런 직업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광부입니다. 근로기준법에 여성은 갱내에서 일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죠.
우크라이나군에도 이처럼 전근대적이고 성차별적인 제도와 문화가 남아 있습니다. 여성을 전투 병과에서 배제한 법은 이제 바뀌었지만,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은 여전하죠. 지난해 독립기념일 행사 퍼레이드를 준비하는 여성 사관생도에게 하이힐을 신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정치인뿐 아니라 세계 언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런 ‘차별 의식’이 남아 있는데도, 여성에게 전투병과를 개방하고 나서부터는 우크라 여군의 숫자가 확연히 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우크라이나 군인 21만명 중 15%인 3만2000여명이 여성인데요. 2017년 2만1000명이었던 게 5년 만에 52%나 늘어났죠.
여성군인에 대한 처우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긴 합니다. 지금은 병원에 산부인과가 개설돼 있고 여성용 속옷도 보급됩니다. 군내 성평등 담당자가 우크라이나 전역 400여개 군사기지에 배치돼 있기도 하죠. 남성 군인에게 보급되는 신발과 군복, 심지어는 속옷을 입고 전장에 나서야 했던 게 불과 몇 년 전이었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에 병력을 끌어모으던 지난해 12월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국방부가 여성을 전시에 동원할 수 있도록 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18~60세까지 여성 중 의료·금융·언론 등 특정 전문분야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차출한다고 합니다. 원래 징병제 국가인 우크라이나에선 남성만 징집 대상이지만, 전시엔 강제는 아니지만 여성도 동원할 수 있게끔 조치한 겁니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열악한 군 상황 때문입니다.
2014년 돈바스 전쟁 이후 터키제 드론과 미국제 재블린 미사일 등의 무기를 들여왔고, 병력도 20만 넘게 끌어올렸다고는 하지만 우크라이나군은 가난합니다. 우크라이나 국방비는 50억 달러 정도로 우리의 460억 달러에 턱없이 못 미치죠. 옆 나라 폴란드와 비교해봐도 군인 숫자는 21만명 대 16만명으로 5만명 더 많은데, 국방비는 폴란드 145억 달러의 3분의 1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사실 현재 모든 시민의 의용군화를 독려하고 있죠. 정규군이 아닌 일종의 의병이나 시민군 개념입니다. 정부가 직접 시민들에게 소총을 지급합니다. 국방부는 트위터에 화염병을 만드는 법과 전차의 어느 부위에 던져야 효과적인지도 올려놓고 있습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에선 후원을 받아 의용군을 지원하는 시민단체도 활성화돼 있다고 하죠.
여성들이 전쟁에 뛰어드는 이유도 국방 사정이 워낙 좋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고요. 이렇게 모인 사람들은 일종의 용병처럼 우크라이나군과 개별적 계약을 맺고 활동하게 됩니다. 시민들은 낮에는 자기 직장에서 일하고 퇴근 후 저녁 혹은 주말을 활용해 군사 훈련을 받습니다.
국민 전체가 PTSD에 시달리는 나라
이렇게 전쟁이 일상이 돼 여성들까지도 전투에 뛰어드는 나라가 우크라이나입니다.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향후 국가적 근심거리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앞서 말한 소개해 드린 다큐멘터리 ‘보이지 않는 부대’엔 PTSD에 시달리는 한 퇴역 여성 장교가 나옵니다.
옥사나 야쿠보바(51)는 우크라이나 재무부에서 수석경제학자로 일했던 인텔리지만, 전쟁이 터지자 돈바스로 자원해서 전투에 투입됩니다. 이후엔 인사 대대 장교로 복무하며 병사를 작전 지역으로 보내는 일을 했죠.
“전쟁에서 나오니 더 지옥이에요. 전쟁에서 죽는 것보다 전쟁 뒤 살아남는 게 훨씬 더 힘들어요. 지하철을 타러 내려가면 겁에 질려요.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요.”
병사를 사지로 내몰았다는 죄책감이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야쿠보바는 자살 충동에 시달려 심리 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크게 나아지지는 못했습니다.
“작전 지점으로 가라고 군인들을 설득하는 게 너무 괴로웠어요. 불가능한 작전이었거든요. 무조건 가야 한다고 어떻게 설명해야 하죠. 거기 가면 100% 죽는다는 걸 전 알고 있었어요.”
남겨진 자의 죄책감과 슬픔이 어느 정도인지, 그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우크라이나에선 이미 2014년부터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참전용사 수삭은 현재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죠. “전투를 함께 했던 동료가 16층에서 몸을 던졌어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때문이래요. 나라 전체가 PTSD에 고통받고 있어요.”
이 기사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전쟁 전 번듯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쟁 전 세르게예바는 홍보전문가였고, 두 아이의 엄마 마트비엔코는 경제학자였으며, 수삭은 전쟁 전 브랜드 매니저와 통역사로 일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꿈을 찾아가던 사람들이 참혹한 전쟁터로 떠났던 거죠. 이들이 일상에 복귀해 행복을 찾아갈 수 있도록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다시 찾아오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