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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난 '송가인길' 마약 곤욕 '박유천길'…이 도로들의 정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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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경기도 평택시 '소방관 이병곤길'. 2015년 서해대교 화재 사건 당시 순직한 이병곤 소방령을 기리는 길이다. [평택시]

경기도 평택시 '소방관 이병곤길'. 2015년 서해대교 화재 사건 당시 순직한 이병곤 소방령을 기리는 길이다. [평택시]

경기도 평택시 평택항 국제터미널 부근엔 ‘소방관 이병곤길’이라는 이름의 도로가 있다. 법정 도로명은 ‘평택항만길’이지만, 터미널 입구(평택항만길 78)에서 만호사거리(평택항만길 1)를 잇는 750m 구간엔 사람 이름을 붙였다. 지난 2015년 12월 서해대교 주탑에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다가 순직한 이병곤 소방령을 기리기 위한 작명이다. 평택시가 지난해 11월 서해대교와 가까운 도로에 명예도로명을 부여했고 순직 소방관의 이름이 붙은 최초의 도로가 됐다.

평택시 관계자는 “적극적인 진압으로 더 큰 사고를 막은 이들을 기리고 예우하기 위해 이 소방령의 이름을 딴 명예도로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명예도로’가 늘고 있다. 지역 사회헌신도와 공익성을 따져 사람의 이름 등을 법정 도로명과 병기해 사용할 수 있게 지자체가 정한 도로다. 기업이나 해외 자매도시, 유명인, 역사적 사건 등이 이름에 사용된다. 지정 후 5년간 사용한 뒤 연장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프란치스코 교황 이름 딴 명예도로 4곳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전국에 설치된 명예도로는 228개다. 유명인 등 사람 이름과 관련된 도로가 110여개로 가장 많다. 국내·외 도시 이름이 사용된 명예도로는 30여개, 기업·대학 등을 내세운 것은 20여개다. ‘2·28민주로(대구 중구)’, ‘4·1만세로(대전 중구)’ 등 역사적 사건을 도로명에 담은 경우도 있다.

대전과 충남 당진.서산시와 세종시에는 2014년 8월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을 기념한 명예도로 4곳이 있다. 사진은 교황 방한 당시 카퍼레이드 모습. [중앙포토]

대전과 충남 당진.서산시와 세종시에는 2014년 8월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을 기념한 명예도로 4곳이 있다. 사진은 교황 방한 당시 카퍼레이드 모습. [중앙포토]

국내 명예도로에 가장 많이 이름을 올린 인물은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대전시 유성구와 충남 당진시, 세종시(이상 프란치스코 교황로), 충남 서산시(교황 프란치스코 순례길) 등 4곳에 교황의 이름이 적힌 도로가 있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기념해 방문지를 명예도로로 지정한 것이다.

대표적인 유형은 지역 출신 유명 인물이나 주요 사건 관계자를 언급한 경우다. 가수 김광석의 고향인 대구 중구에 조성된 ‘김광석 다시 그리기길’이나 노동운동가 전태일 열사와 관련된 ‘전태일길(서울 도봉구)’, ‘전태일평화시장길(서울 중구)’ 등이 있다.

고(故) 김광석의 26주기인 6일 대구 중구 '김광석 길'을 찾은 시민들이 그의 웃음 가득한 벽화를 보며 추모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故) 김광석의 26주기인 6일 대구 중구 '김광석 길'을 찾은 시민들이 그의 웃음 가득한 벽화를 보며 추모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명인 앞세운 명예도로 급증

최근엔 한창 활동 중인 유명 연예인·방송인·스포츠스타를 내세운 명예도로 지정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 종로구 ‘송해길’, 인천 동구 ‘류현진거리’, 충남 예산군 ‘백종원거리’, 강원 양구군 ‘소지섭길’ 등이다.

유명인의 팬덤이 관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전남 진도군은 2020년 8월 트로트 가수 송가인의 고향이라는 점을 내세워 ‘송가인길’ 등을 조성해 하루 평균 2000명이 찾아올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송가인마을’, ‘송가인공원’ 등도 만들었다. 진도군 관계자는 “현재도 주말 평균 500~700명이 찾을 정도로 새로운 지역 명소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남 하동군 진교면에 있는 정동원길. 인기 트로트 가수인 정동원군을 찾는 팬들이 늘자 지역 문화를 알리기 위해 지정됐다. 하동군

경남 하동군 진교면에 있는 정동원길. 인기 트로트 가수인 정동원군을 찾는 팬들이 늘자 지역 문화를 알리기 위해 지정됐다. 하동군

트로트 열풍 도로명에 나타나 

광주시 동구 충정로에 있는 ‘K-POP 스타 거리’는 방탄소년단(BTS) 멤버 제이홉 등 한류 스타들의 핸드프린팅 등이 설치돼 국내외 팬들 사이에서 “꼭 가야 할 곳”으로 유명해졌다.

트로트 열풍에 10대 트로트 가수의 이름을 내세운 ‘정동원길’과 ‘김다현길’을 지정한 경남 하동군 관계자는 “두 길 모두 가수 인지도에, 길이 예쁘다고 소문이 나면서 팬들은 물론 일반 관광객들도 찾는 관광코스가 됐다”고 말했다.

유명 연예인의 이름을 내세운 명예도로는 더 생길 전망이다. 경기 화성시에선 가수 조용필을 앞세운 명예도로 지정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한성규(53) 문화공장소·화성협동조합 이사장은 “화성은 조용필씨의 고향인데도 관련 콘텐트가 전무한 상태”라며 “화성시에 조용필 문화사업과 명예도로 지정을 제안한 상태”라고 말했다.

주민 의견 수렴 등 거쳐야

지자체 등이 추진한다고 해서 모두 명예도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여러 차례 주민 의견을 수렴하고 주소정보위원회 심의 등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주민 반발 등으로 무산되는 경우도 있다.

화성시는 2015년 용주사와 융건릉이 있는 기안동과 안녕동 일대 도로에 지역 출신 유명 축구선수인 ‘차범근’의 이름을 넣는 명예도로 신설을 검토했다. 그러나 용주사 신도와 인근 주민들이 “역사와 지역 정체성과 상관없이 명예도로명을 결정했다”고 반발하면서 최종 무산됐다.

경기도 포천시도 트로트 가수 임영웅의 이름을 딴 ‘임영웅 트로트 거리’를 추진했으나 “유명 가수 1명을 내세워 트로트 거리를 만드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 등에 흐지부지됐다고 한다.

유명인 일탈로 조용히 사라지기도 

유명인의 일탈로 사라지거나 지역색이 없어 구설에 휘말리는 일도 있다. 인천 계양구는 2013년 가수 겸 배우 박유천의 이름을 넣은 ‘박유천 벚꽃길’을 지정했다가 박씨의 마약 투약 혐의로 곤욕을 치렀다.

광주 서구에 있는 ‘센다이로’는 광주시의 자매도시인 일본 센다이시의 이름을 딴 명예도로인데 “항일운동 본고장인 광주 도심 한복판에 왜 일본 도로명이 있느냐”는 비난이 제기됐다.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명예도로명이 법정 도로명과 함께 사용돼 혼란스럽다는 의견도 있지만, 지역 홍보 효과 등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유명세를 내세우기보단 지역색이나 사회공헌도·공익성 등 여러 면을 따져서 지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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