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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안락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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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경희 기자 중앙일보 P디렉터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안락사의 뜻을 풀면 ‘편안하고 즐거운 죽음’이다. 가망 없는 중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인위적으로 약물을 주입해 사망하게 하는 ‘적극적 안락사’를 주로 가리킨다. 약물과 음식물 투입 등의 처치를 하지 않는 건 ‘소극적 안락사’, 불필요한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는 건 ‘존엄사’다.

우리나라에서 존엄사는 조건이 까다롭기는 하나 합법이다. 2018년 2월부터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시행되면서다. 회생 가능성이 없고 임종이 가깝다고 의료진이 판단한 상태에서 본인이나 가족 의사에 따라 연명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서약한 사람은 지난 4년간 총 121만953명. 실제로 연명 치료를 유보하거나 중단한 사례도 20만 건이 넘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만 19세 이상이면 누구나 작성해 무료로 등록할 수 있다.

‘세기의 미남’ 배우 알랭 들롱(86)이 안락사를 결심했다고 한다. 2019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대중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는 건강이 더 악화하면 안락사를 택하기로 하고 아들의 동의도 구했다. 그는 프랑스인이지만 안락사가 합법인 스위스 시민권도 갖고 있다. 그가 선택한 안락사는 정확히 말하면 ‘조력자살’이다.

네덜란드·벨기에·캐나다·룩셈부르크·콜롬비아·뉴질랜드 등 안락사가 합법인 나라들은 대부분 ‘의학적으로 개선의 여지가 없는 참을 수 없는 고통’ 등에 한해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반면 스위스에선 나이나 통증 여부와 관계없이 유산 상속 등 ‘이기적 동기’가 없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 자살할 수 있다. 안락사를 원하는 이와 병원을 연결해주는 조력자살 업체도 있다. 『오래된 유럽』의 저자 김진경은 안락사나 조력자살이 ‘좋은 죽음’인지 아니면 ‘좋은 삶’의 실패인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스위스에선 “고통 완화 치료나 호스피스 케어에는 거의 투자가 이뤄지지 않았”다면서다.

들롱의 소식을 전하는 뉴스에 “죽는 거라도 행복하게 죽고 싶다”며 안락사를 갈망하는 댓글이 숱하게 달렸다. 고독사 후 뒤늦게 발견돼 가족이나 시민사회에 폐를 끼칠까 봐 두려워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죽음으로 내몰리는 건 ‘안락’이라 할 수 없다. 안락사 논의는 피할 수 없겠지만, 안락한 삶을 먼저 걱정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