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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찬의 인프라

역대 가장 단출한 노동공약, 그래도 강력한 한 방 숨어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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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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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의 고용노동정책은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윤석열 정부에서 고용노동정책은 문재인 정부와 확연한 차이를 보일 것이라는 분석에 토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문 정부는 ‘노동존중’을 표방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선 노동단체의 빚 청산 요구를 거의 수용했다는 평을 받는다. 오죽하면 노조가 근로계약 관계도 없는 회사를 불법 점거해도 놔뒀다. 이런 기조는 문 정부 출범 초부터 예견됐다. 문 대통령은 대선 공약 중 노동분야에 방대한 양을 할애했다. 취임 뒤 첫 외부행사도 노동계와 함께했다. 취임 이틀 만에 인천국제공항공사로 달려가 ‘비정규직 제로 선언’을 한 게 그것이다. 비정규직은 악(惡)이라는 메시지를 경영계에 던졌다. 이를 비판하는 경제단체 부회장을 그로기 상태로 만들어 물러나게 했다. 비정규직뿐 아니라 노동시장에서 선과 악의 이분법 프레임은 일상화했다.

체계적이지 않지만 큰 줄기 3가지
52시간 지키되 근로시간 유연하게
강성노조 불법 엄단해 법치 확립
임금체계는 직무·성과 중심 개편
기성 노조보다 MZ와 통하는 강점

윤석열 당선인이 지난해 12월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앞줄 왼쪽)에게서 정책 요구 책자를 받고 있다. [뉴스1]

윤석열 당선인이 지난해 12월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앞줄 왼쪽)에게서 정책 요구 책자를 받고 있다. [뉴스1]

윤 당선인 정부에선 어떨까. 어느 정부든 대선 공약을 보면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윤 정부에 대해선 아리송하다. 너무 단출해서다. “역대 후보 중 노동공약이 가장 심플하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대선 당시 국민의힘 내부에선 “노동계에 호소할만한 게 없다”는 불안감도 감지됐다. 노동계의 지지는 실제 표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상징성이 있다. 이를 포기한 듯한 인상마저 줬다.

익명을 요구한 윤 대선 캠프 관계자는 “당선인이 후보 시절 내가 소화할 수 있는 것만 공약에 담아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캠프에서 마련한 노동공약을 보고는 “내가 잘 모르겠다”며 반려하기도 했단다. 노동정책은 어렵다. 정부가 밀어붙인다고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상대(노동계와 사용자)가 있다. 그래서 경제사회노동위원회라는 노사정 대화체가 법적 기구로 존재하는 것이다. 다른 정책과 달리 노동정책은 노사정의 의견을 물어 정리할 필요가 있다. 윤 당선인은 이를 의식한 듯 정리되지 않은 노동정책의 공약화를 꺼린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윤 당선인의 노동공약은 노동시장이라는 큰 틀에서 보기보다 생활밀착형 공약처럼 소단위로 다뤄진 듯한 느낌이다. 단편적이어서 체계적이지 않다.

그래도 줄기는 있다. ▶근로시간 유연화 ▶법치 확립 ▶임금체계 선진화 세 가지다. 간단한 듯 보이지만 어쩌면 노동시장에 강력한 한 방이 될 수 있다. 윤 당선인의 말처럼 그가 이해할 법한 것만 담았기에 국민에게 더 쉽게,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기성 노조가 아니라 MZ세대와 통한다는 점이 강점이다.

민주노총이 21일 새 정부 국정과제 요구안을 인수위 관계자에게 전달하는 모습. [뉴스1]

민주노총이 21일 새 정부 국정과제 요구안을 인수위 관계자에게 전달하는 모습. [뉴스1]

근로시간과 관련해선 유연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주 최대 52시간제는 훼손하지 않는다. 대신 근로자가 일하는 시간을 자유롭게 정하도록 결정권을 강화하려 한다. 회사의 일방통행식 근로시간 배정을 제어하면서 근로자 의사 우선주의를 택하겠다는 뜻이다. 선택적 근로시간제와 근로시간저축계좌제 확대 등이 그것이다. 이 제도의 근간은 주(週) 단위로 근로시간을 규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월(月) 또는 연(年) 단위로 총 근로시간을 계산해서 주당 평균 52시간을 넘지 않으면 된다. 어떤 주 또는 월에는 좀 더 일하고, 다른 주나 월에 일하는 시간을 줄이거나 휴가를 가면 된다.

넘어야 할 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을 더 많이 하는 동안 과로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자칫 번아웃(burnout)이 발생하면 생산성이 떨어지고, 산재 사고 발생 위험도 높아 결국 국가적 손해가 발생하기에 십상이다. 적절한 안전대책이 버무려져야 근로자의 자기결정권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

법치 확립은 윤 당선인이 줄곧 강조했다. “전체 근로자의 4%를 대변하는 강성노조는 완전히 치외법권” “강성노조, 이게 왜 강성인 줄 아시느냐. 세고 열심히 해서만 강성이 아니다. 불법을 일삼는다” 등 선거운동 내내 불법 엄단을 천명했다. “코로나19로 집회가 금지됐는데, 강성노조가 수천 명 시위하는데 구속영장 청구됐단 얘기 들으셨나. 그냥 놔둔다”며 정부의 방관을 경계했다. 문 정부와 완전히 다른 길을 갈 전망이다.

윤 당선인의 공약 중 가장 주목받는 것은 임금체계 개편이다. 해만 바뀌면 자동으로 오르는 호봉(연공급)제를 직무와 성과 중심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단순히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령사회에 따른 노동력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유경준 국민의힘 의원은 “임금체계를 직무·성과형으로 전환하는 기초만 닦아도 노동개혁의 절반 이상을 성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세 가지 골격은 ‘공정한 성과급 배분’ ‘자유로운 근로시간·휴가 활용’ ‘기득권 노조, 누굴 위한 노조인가’라는 MZ세대의 목소리와 궤를 같이한다.

이들 공약이 실현되려면 노사의 협조와 설득이 절실함은 말할 것도 없다. 더불어 정부의 전향적 태도도 필요하다. 복지와 노동을 큰 틀에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사회안전망의 보완, 연금개혁 같은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복지의 단위를 가족에서 개인으로 바꿔야 한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피부양자 의무 폐지는 더는 가족이 복지의 테두리가 아니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전 국민 소득파악이나 근로계약형 법제도 개선을 위해서라도 해야 한다. 사회안전망 확대나 자영업자 손실 보상, 플랫폼 종사자 보호 등은 그 기초 위에서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