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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DJ·盧도 인정…"시골공무원 정말 중요해!" 버럭 노교수 정체 [추기자의 속엣팅]

중앙일보

입력

추기자의 속엣팅

 한 사람의 소개로 만나 속엣말을 들어봅니다. 그 인연을 통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요. 인연 따라 무작정 만나보는 예측불허 릴레이 인터뷰를 이어갑니다.

추기자의 속엣팅

추기자의 속엣팅

 [프롤로그] 조문환 ‘놀루와’ 대표는 20여년 전 그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경남 하동군을 방문한 서울대 교수를 안내하면서 “제가 서울 못 가고 시골에서 공무원하고 있다”고 자조 섞인 말을 했다가 혼이 났던 그날입니다. 그 교수는 “고향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데 무슨 말이냐”며 버럭 혼을 냈답니다. 조 대표가 책 『나는 마을로 출근한다』에도 소개한 일화죠. 그 교수가 김신일 전 교육부총리입니다. 그가 사인해서 보내준 책을 간직하고 있다는 조 대표는 이번엔 자신의 책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김신일 전 교육부총리가 지난달 7일 오전 서울 중구 중앙일보 서소문 사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김신일 전 교육부총리가 지난달 7일 오전 서울 중구 중앙일보 서소문 사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김신일(81) 전 교육부총리(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는 학창 시절 데모꾼이었다. 서울대 교육학과 대표였던 그는 4·19 당시 경무대(옛 청와대) 최전방에 나섰다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총에 맞아 숨지는 걸 목격하고도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 그때 아지트가 고(故)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집이었다. 지난달 7일 중앙일보 서소문 사옥에서 만난 그는 “과 동기였던 김국태(김근태의 형) 집에서 매일 시위를 모의했는데 중학생이던 근태가 담배 심부름을 왔다가 옆에 앉아있곤 했다”면서 “그러더니 대학 가서 일등 데모꾼이 되더라. 그에게 우리가 죄 지은 기분”이라고 했다.

목숨 건 데모꾼, 35살에 유학길 

대학원 진학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 낮은 임용률 탓에 사범대를 졸업해도 발령이 나지 않아 취직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을 꿈꿨던 그는 “신일이가 대학원을?”, “도망 안 가냐”는 교수들의 반응에 오기로 공부를 했고, 석사 학위를 마친 후 서울여대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교육 활동가의 길을 걷기로 했다. 박사 학위가 필요했다. 35살에 유학을 떠나 3년도 되지 않아 최단기 박사 기록을 세우고 모교로 돌아왔다. 아들이 박사 학위를 못 받고 온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는 몇 달 후에 우편으로 도착한 학위증을 보고도 “내가 꼬부랑 글을 어떻게 알겠냐”면서 의심했다고 한다.

지난달 7일 오전 서울 중구 서소문동에서 김신일 전 교육부총리. 장진영 기자

지난달 7일 오전 서울 중구 서소문동에서 김신일 전 교육부총리. 장진영 기자

김 전 부총리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교육개혁의 꿈을 본격적으로 펼칠 수 있었다. 대통령자문 교육개혁위원회에서 내신제와 수시 전형을 추진하면서 언론 인터뷰에 적극 나섰고, 교육예산을 국민총소득(GNP)의 5%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공약 이행도 줄기차게 요구했다. “교육에 그렇게까지 돈을 못 쓴다”는 청와대에 “그땐 선거에 필요해서 공약했고, 지금은 재원이 부족해서 못한다고 발표할 것”이라고 압박한 끝에 김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에 GNP 5%를 실현했다.

교육개혁위원회가 강조했던 “교육부 장관을 부총리로 격상시켜야 교육이 산다”는 주장은 김대중 정부에서 실현됐다. 김 전 총리가 한 토론회에서 초등학교 건축 예산이 부족해 컨테이너 교실을 운영하는 인천의 현실을 두고 “YS가 경제 망친 대통령이면 DJ는 교육 망친 대통령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한 발언이 보도된 게 계기였다. 다음날 김대중 대통령이 “괘념치 마시라”는 참모의 발언에 “그렇게 말할 만하다. 교육 잘한 대통령으로 남고 싶다”면서 이뤄진 일이라고 한다.

靑과 로스쿨 이견, 임기 20일 남기고 사퇴  

2006년 9월 20일 노무현 대통령(왼쪽)에게서 임명장을 받는 김신일 교육부총리. [중앙포토]

2006년 9월 20일 노무현 대통령(왼쪽)에게서 임명장을 받는 김신일 교육부총리. [중앙포토]

그렇게 격상된 부총리 직책을 참여정부에서 직접 맡게 됐다. 고등학교 내신성적 실질반영률을 높이는 대학입시 개혁에 팔을 걷어붙였다. 그는 “대학은 고등학교 때 공부를 제대로 잘했는지 평가해서 학생을 선발해야지, 입맛대로 하면 초·중·고 교육이 다 죽는다”고 했다. 직접 전국 강연을 다니며 “정부가 대학 잡는다”는 여론에 반박했다. 임기 말엔 법학전문대학원 도입이 쟁점이었다. 청와대와 갈등 끝에 임기를 20일 남기고 사퇴했다. 그는 “청와대는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지방 로스쿨 확대를 요구했고, 나도 그에 동의했지만 지나친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서거 한 달여 전쯤 봉하마을에서 함께 한 식사가 마지막이었다. “그땐 제가 고집부려서 미안했다”는 김 전 부총리에게 노 전 대통령은 “일하다 보면 그럴 수 있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에 따르면 사실 김 전 부총리가 사표를 제출하자 “굳이 뭘 수리하냐”고 했지만, 참모진이 “임기가 하루 남아도 청와대와 생각이 맞지 않는다면 기강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해 사표를 수리했다고 한다.

“도시만 스마트하면 사람 소외”

김 전 부총리는 55살에 시작한 암벽등반을 70살까지 했을 정도로 건장한 체력을 자랑한다. 지금도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오르내리는 김 전 부총리는 학술 활동에도 여전히 열정적이다. 지난 2020년엔 평생학습에 대한 그의 신념을 담아 저서 『학습사회』를 출간했다. 그는 “아동·청소년기 때만이 아니라,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이뤄지는 교육도 그 가치를 인정하는 이른바 ‘학습인증제’를 제대로 운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업시대엔 생산의 3요소가 토지·자본·노동이었는데 정보시대인 지금은 사람·아이디어·지식으로 바뀌었고, 아이디어와 지식은 너무 빠른 속도로 변한다”면서다.

그는 특히 스마트 시티 건설 붐을 두고 “사람은 스마트하지 못한데 도시만 스마트해지면 사람은 소외된다”고 꼬집었다. “지금도 노인들은 스마트폰이나 키오스크 같은 기기를 다룰 줄 모르니 점점 소외되잖아요. 답은 사람에 있습니다. 사람이 평생 배우고 그걸 사회에 활용할 수 있다면 우리의 고질적인 학벌주의, 양극화 문제도 풀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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