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최)준용아. 물을 마지막까지 짜내서 뿌리기냐?”
“감독님! 우산으로는 못 막아요. 다음번에는 우비 입고 오세요. 하하.”
18일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프로농구 서울 SK의 포워드 최준용(28)이 500ml 생수병으로 물 세례를 퍼붓자, 전희철(49) 감독이 빨간우산으로 막으며 끙끙 댔다. 올 시즌 중계방송 인터뷰를 하던 전 감독에게 최준용이 ‘물폭탄’을 퍼부어 화제가 됐는데 그 모습을 재현 한거다. 프로스포츠에서 수훈 선수에게 축하 물세례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지만, 선수가 감독에게 두 번이나 이런 행동을 하는 건 이례적이다. 최준용은 생수병을 전 감독의 목덜미에 꼽고, 우산 안으로 물을 뿌리기도 했다.
전 감독이 최준용을 째려보며 “너랑 내가 ‘톰과 제리’면 누가 톰이냐”고 물으니, 최준용은 “감독님이 매번 당하시니까, 제가 제리 아닐까요”라며 웃었다. 전 감독은 최준용에게 헤드락을 걸고 꿀밤 때리는 시늉을 했다. 전 감독은 “감독들의 가치관의 차이다. 난 코트 안에서는 수직 관계지만, 일이 끝난 다음에는 수평 관계가 맞다고 생각한다. 선수가 코트에서 최선을 다했는데 장난을 안 받아줄 이유가 없다”고 했다.
SK는 올 시즌 38승11패로 1위다. 2위 수원 KT에 5.5게임 앞서 우승을 눈 앞에 뒀다. 득점(85.8점)과 리바운드(39.2개)는 물론 경기당 속공이 6.9개(338개)로 압도적 1위다. 2위 고양 오리온(4.9개)보다 2개 더 많다. 5G(5세대 이동통신)급 스피드 농구다. 전 감독이 선수들과 형동생처럼 지내는 ‘형님 리더십’을 발휘하자, 공을 잡으면 최준용과 김선형, 안영준, 자밀 워니 등 5명이 함께 신나게 달린 결과다.
최준용이 경기 중 전 감독에게 달려가 몸으로 ‘하이파이브’하는 이른바 ‘어깨빵 사건’도 있었다. 최준용은 “팀에 에너지를 불어 넣고 싶어 소리를 질렀는데 마침 감독님이 보여 어깨로 툭 쳤다”고 했다. 전 감독은 “갑자기 얘가 달려오길래 ‘설마 나한테 오는 건 아니겠지’ 생각했다. 이길 수 있다면 내 어깨쯤은 기꺼이 내줄 수 있다”며 웃었다.
물론 전 감독이 타임아웃 때 ‘버럭’하며 호통 칠 때도 있다. 아예 침묵하며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전 감독은 “올 시즌 목표가 ‘가비지 타임(20점 차로 벌어져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을 주지 말자다. 선수들이 영혼이 나간 채 경기를 놔버릴 것 같아서 이런 목표를 세웠다”고 했다. 최준용은 “감독님 이야기를 듣고 정신이 바짝 들었다. 선수 누구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고 했다.
전 감독은 올 시즌 처음 감독을 맡았다. SK에서 코치만 10년간 하며 내공이 쌓였다. 최준용은 “작년에 감독님과 ‘롤(리그오브레전드, LOL)’을 같이 한 적도 있다”고 했다. ‘얼리 어답터’로 유명한 전 감독은 미국 연수 시절에 배운 프로그램으로 공격 패턴을 만들어 선수들에게 보여준다.
지난달 SK가 12연승을 달리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전 감독에게 직접 전화해 격려했다. 전 감독은 “회장님이 ‘행복한 농구를 해달라’고 당부하셨다”고 했다. 최준용은 “회장님 나중에 저랑도 통화해주세요. 본관이 같은 최씨인지 궁금해요”라고 했다.
지난 시즌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됐던 2m 장신 포워드 최준용은 올 시즌 평균득점이 두 배(8.1점→16점)로 늘었다. 최준용과 팀 동료 김선형이 강력한 MVP(최우수선수) 후보다. 둘 중 한 명만 꼽아달라고 하자 전 감독은 “나도 딸이 둘인데, 첫째 딸이 좋냐, 둘째 딸이 좋냐는 질문과 같다”고 했다. 최준용은 “저라고 적어주세요”라고 장난치더니 “제가 MVP 욕심이 있었다면 이렇게 농구 안하고 패스도 안 했을 거다. 감독님 주문을 따르고 선수들과 케미(스트리)를 맞추고 있다”고 했다.
지난달 프로농구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하자 최준용은 소셜미디어에 ‘희생자 한 명 나와야 대처하실 거에요?’란 글로 KBL(프로농구연맹)을 저격했다. 최준용은 “1위 팀이 목소리를 내야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집단감염이 발생한) 상대팀 선수들 얼굴이 힘들어 보였다. 단 한 명도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정당당하게 진정한 승부를 겨루고 싶었다”고 했다. 전 감독은 “글을 잘 올렸다고 했다”고 거들었다.
SK는 안양 KGC인삼공사에 상대 전적 1승4패로 열세다. 전 감독은 “선수 탓 할 생각은 없고 내 능력 부족이다. KGC는 3점슛 30개 이상을 쏘려는 팀이다 보니 리바운드가 멀리 튄다. 우리 장점인 리바운드의 이점을 살리기 어렵다. 원패스와 몰아치기 등 우리가 잘하는 걸 더 잘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최준용은 “플레이오프에서는 객기가 아니라 자신 있다”고 했다. 손가락과 햄스트링를 다친 김선형과 워니는 정규리그 막판에 복귀 예정이다.
전 감독은 “저도 동양 선수 시절 할아버지를 하늘로 떠나보내고 뛴 적이 있는데, 준용이도 작년 12월에 자신을 키워주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 상을 당하고도 경기에 출전하겠다고 하더라”며 고마워했다. 최준용은 “할머니를 모신 곳(마산)에 못 가겠더라.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한 뒤 돌아가신 할머니께 트로피를 바치겠다”고 했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전 감독은 “준용아. 근데 너 우승하면 정수기 물통 뽑아서 나한테 물 뿌릴거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최준용은 “라커룸에서 샴페인 뿌려야죠. 감독님 만취하시게”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