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했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요, '아니 이런 사람이 어떻게 산에만 있었냐'는 댓글이 좋더라고요"
KBS '개승자' 우승팀 이승윤
부활한 KBS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12대 1의 경쟁 끝에 살아남은 건 7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자연인' 이승윤(45)이었다. 2020년 6월 '개그콘서트'(개콘)가 폐지된 뒤 1년 4개월만에 생긴 지상파 코미디 프로그램 '개승자'(KBS2) 우승팀 이승윤은 2015년 개콘 하차 후 MBN '나는 자연인이다'로 더 많이 알려진 KBS 21기 코미디언이다. 지난 15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만난 그는 "그간 관객 웃음소리를 잊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무대에 서서 웃음소리를 들으니 '내가 이것 때문에 그렇게 즐겁게 개콘을 했었지' 싶었다"며 "저는 자연인이지만 희극인이고, '개그맨 이승윤'으로 다시 불리게 된 것만으로도 '개승자' 최대 수혜자"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는 '개승자'로 지난 연말 KBS 연예대상 우수상도 받았다.
"헬스를 검색했는데 제로투가 왜 나와? 모두가 겪는 일"
이승윤은 홍나영(31), 심문규(32), 쌍둥이인 이상민·이상호(41)와 짠 팀으로 유튜브 좋아요 수, 생방송 문자투표에서 압도적 점수를 얻어 파이널 라운드 1위를 차지했다. 현장 관객점수도 내내 1~3위였다. 이들의 코너 '신비한 알고리즘의 세계'(신알세)는 유튜브 알고리즘을 따라 황당하게 이어지는 영상을 재생했다 멈췄다 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현실고증' 개그다.
'헬스'로 검색을 시작해 '헬스보이' 이승윤, 퍼스널 트레이너가 가슴 근육으로 춤추는 영상 등을 거쳐 '제로투'(SNS상에서 유행하는 짧은 춤) 영상으로 이어지는 식이다. '먹방'을 검색해 나온 레몬 먹방이 오로나민씨로 연결되고, 김연경-식빵언니-빵상 등으로 아무렇게나 이어지는 말장난같은 알고리즘을 그대로 표현했다. 이승윤은 "예측할 수 없이 뜨는 알고리즘은 모두가 경험하는 일이고, '예측이 안되는' 점이 재밌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개승자' 초반에는 12팀 중 '가장 먼저 탈락할 것 같은 팀'으로 꼽히기도 했다. 이승윤은 "나는 개그 무대가 2015년이 마지막이었고, 산에만 다니다보니 감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나 보더라"며 "탈락 1순위로 꼽혔는데 진짜 첫 회에 탈락하면 안되겠다는 오기가 생겼다"고 했다. 그는 "알고리즘 아이디어는 홍나영이 시작했다"며 "멤버를 잘 고른 덕에 첫 단추를 잘 꿰어서 우승까지 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20개 밈 빼곡…아이키도 등장
'신알세'는 8~10분 안에 15~20여개의 '밈'(웃기게 회자되는 짧은 상황)을 빼곡하게 채워넣었다. 밈 하나당 10~15초에 불과하다. 보통의 개그보다 2~3배 빠른 속도로 짠 개그다. "다음에 뭐가 나올지 예상하기 전에 미리 나와버리는" 게 중요해서, 빨간색 커튼도 후배 개그맨에게 맡겨 박자를 맞췄다. 상금 1억도 팀원 5명이 나눠가진 뒤, 일부를 모아 ‘커튼맨’ 이창윤·방주호에게 나눠줄 생각이라고 했다.
GD를 따라하는 'GD병' 악뮤 찬혁, '퇴사짤', '사딸라', '노담이면 좋겠어', 카페베네 엔딩 등 SNS상에서 친숙한 여러 이미지와 '자연인' 이승윤 패러디,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판정 패러디('눈 뜨고 코 베이징') 등을 코믹하게 재현했고 , 지압판·레몬·아이스크림·콜라먹기·김치싸대기 등으로 현장성을 살린 재미도 챙겼다.
아이키·이태선(개그콘서트 '이태선 밴드')·이수지 등 '의외의 인물'을 등장시킨 것도 재미를 더했다. 파이널 3차전에선 이승윤의 여덟 살 아들도 등장했다.아이키는 이승윤이 직접 섭외했다. "2020년 아이키의 안무 영상을 보고 춤이 너무 좋아 무작정 DM으로 연락했고, 지금도 친하다"고 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도 그대로 나갔다, "KBS도 많이 열린 분위기더라"
쉴 때도 유튜브, SNS 짧은 영상 등을 본다는 이승윤은 91년생 홍나영, 90년생 심문규 등과 세대차를 많이 느끼진 않았다고 했다. SNS 밈으로 채운 코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그는 "요즘은 50~60대도 유튜브를 다 봐서 대부분은 알고, 혹 누군가는 이해를 못하더라도 웃을 수 있게 만드는 게 과제"라고 말했다.
"이 뭔 개소리야!"(KBS '태왕사신기' 흑개 장항선 대사), "지랄하고 자빠졌네"(SBS '뿌리깊은 나무' 세종대왕 한석규 대사), "킹받네"('열받는데 어이없이 조금 웃기는') 등 유머로 쓰이는 비속어와 신조어도 고스란히 방송에 나갔다. 이승윤은 "'지랄하고 자빠졌네'는 안 나갈 줄 알았는데, KBS도 예전에 비해서 많이 열려있고, 자유로운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유튜브는 개인의 선택, 사회적으로 'TV 코미디' 있었으면"
'개승자'는 지난해 11월 13일 첫 회 시청률 5%(닐슨코리아)로 문을 열었지만, 지난 12일 시청률 3.8%(닐슨코리아)로 막을 내렸다. 이승윤은 "시청률은 아쉽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순 없다"면서 "'개그 부활'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가능성은 봤다고 생각한다. 시즌2를 원하는 댓글도 많더라"고 덧붙였다.
최근 '장기연애'로 인기를 끈 구독자 102만의 '숏박스(김원훈, 조진세, 엄지윤)', 구독자 150만의 피식대학(이용주, 정재형, 김민수) 등 코미디언들이 개인적으로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개그를 하는 게 흔한 풍경이 됐다. 이승윤 팀의 심문규도 구독자 24만 유튜버 ‘구공탄’이다.
이승윤은 "물론 개그맨 개인은 유튜브로만 해도 된다"면서 "하지만 사람들이 유튜브만 보는 게 아닌데, 그 많은 TV 프로그램 중 코미디 프로그램 하나 없는 건 각박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다 같이 보며 웃을 수 있는 개그 프로그램이 각 방송사마다 하나쯤은 있으면 좋지 않을까"라며 "KBS도 개그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느껴서 좋은 기회를 만들어준 만큼, 개그맨들이 다 같이 노력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었으면 좋겠다.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신인도 너무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