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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연계, 친푸틴 게르기예프 등 러 예술가들 줄퇴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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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0호 18면

러, 우크라 침공에 예술계도 전쟁 중 

친 푸틴 러시아 예술가로 꼽히는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 [사진 Marco Boggreve]

친 푸틴 러시아 예술가로 꼽히는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 [사진 Marco Boggreve]

지난달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세계 공연계는 푸틴 러시아 정부의 만행을 규탄하고 우크라이나와 연대하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서방의 러시아 음악가에 대한 거리두기는 대표적 친 푸틴 예술가로 꼽히는 발레리 게르기예프 마린스키 극장 예술감독의 비토로 시작됐다.

25일 빈 필하모닉은 뉴욕 카네기홀 방문 공연 지휘자를 게르기예프에서 야닉 네제 세갱으로 교체했다. 중립국 오스트리아 기반의 빈 필은 개전 직후 ‘전쟁 반대’의 소극적 자세를 취했으나, 카네기홀은 게르기예프 강판으로 미국 정부의 대러 제재에 동참했다. 이날 친 푸틴 피아니스트로 게르기예프의 중요 협연자 중의 한 사람인 데니스 마추예프를 대체해 조성진이 빈 필에 데뷔하게 된 배경이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은 23일까지만 해도 오페라 ‘스페이드 여왕’ 지휘를 게르기예프에 맡겼지만 전쟁 발발과 함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주세페 살라 밀라노 시장은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지지 표시가 없다면 라 스칼라 잔여 공연을 취소하겠다”고 공개 서한을 보냈고 답변을 거부한 게르기예프를 극장에서 퇴출했다. 뮌헨 필하모닉, 로테르담 필하모닉 역시 각각 게르기예프에의 음악감독, 명예지휘자 직위를 박탈했고 베르비에 페스티벌, 펠스너 에이전시, 게오르그 숄티 재단 모두 그와 절연했다. 국외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게르기예프는 1988년부터 감독직을 맡아온 마린스키 극장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게르기예프는 푸틴과 어떤 인연일까. 199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시 경제자문과 마린스키 감독 자격으로 조우한 이래, 푸틴과 게르기예프는 포스트 소비에트의 혼란을 함께 헤쳐 온 공생 관계다. 게르기예프는 조지아, 크림 분쟁에서 푸틴을 공개 지지했다. 푸틴의 소싯적 유도 대련자인 아르카디 로텐베르그가 이끄는 에너지 기업 스토로이가스몬타슈를 비롯한 올리가르히(러시아 신흥 재벌을 가리키는 러시아어)가 마린스키와 게르기예프 관련 회사에 자금을 대며 그의 예술 활동을 적극 후원했고, 게르기예프는 런던 심포니 음악감독에 오르는 등 유럽에서도 승승장구했다. 게르기예프는 자신의 배후에 푸틴 지원이 있음을 공공연히 밝혀 왔기에 서유럽 음악계의 빠른 손절은 게르기예프의 자업자득이라 할 만하다.

서방 공연계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입장을 요구한 또 다른 거물은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다. 네트렙코는 게르기예프 발탁으로 서구에 진출했고 2008년 푸틴이 수여하는 러시아 인민 예술가상을 받았다. 2014년 친러 분리주의자가 장악한 도네츠크 지역의 오페라하우스에 100만 루블(한화 약 2000만원)을 기부한 다음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기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며 정치색을 분명히 한 바 있다. 최근 취리히 오페라,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뉴욕 메트 오페라가 줄줄이 디바의 출연을 취소한 이유다. 네트렙코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예술가에 정치적 견해를 요구하고 조국을 비난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고 각종 압력에 불만을 표했다.

소프라노 네트렙코 출연 취소 봇물

2019년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한 베르디 오페라 ‘운명의 힘’에 함께 출연했던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과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사진 Bill Cooper]

2019년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한 베르디 오페라 ‘운명의 힘’에 함께 출연했던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과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사진 Bill Cooper]

네트렙코가 예술가의 정치적 중립을 들어 국면을 피하려 하자 독일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이 나섰다. 카우프만은 3월초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은 인류 생존과 관련한 문제로, 인간으로서 모두가 개인적 의견을 표명해야 한다”며 맥락상 네트렙코를 비판했다. 또 “예술가 신분이 이번 사태에 언급을 피할 이유가 될 순 없다”면서 게르기예프 협연을 기다리는 음악가들을 겨냥하기도 했다. 그동안 게르기예프는 자신이 위원장을 맡은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입상한 마추예프를 비롯한 소수 연주자를 회전문처럼 협연자로 기용해 왔다.

러시아 국내 분위기는 어떨까. 국제적으로 신망받는 예술가 대부분은 침묵을 택하고 있지만, 자국의 군사 행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예술가들도 있다. 피아니스트 보리스 베레좁스키는 친정부 성향 TV 토크쇼에 나가 “키이우에 전기를 차단해 우크라이나 압력을 강화”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그의 음악적 절친이었던 파리 체임버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라르스 포그트는 자신의 소셜미디어 를 통해 “우리의 우정은 공식적으로 끝났다”고 항의했다. 서방에서 환영받으며 푸틴과도 비교적 거리를 둔 지휘자 미하일 플레트네프, 테오도르 쿠렌치스, 미하일 유롭스키는 공식 입장은 내지 않고 있지만 근신과 반전 메시지를 담은 프로그램으로 변경하면서 운신하고 있다.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 역시 “모든 전쟁은 비극”이라고 짧게 코멘트했다.

게르기예프가 직접 관할하는 마린스키 극장 소속 가수와 무용수들은 소셜미디어를 통한 반전 표시조차 조심스러워 하는 분위기다. 마린스키 소속 한국인 무용수 김기민은 이달 초 러시아 출발의 항공편 운항이 어려워져 스페인 공연 출연이 취소됐다. 러시아가 한국·미국·영국을 포함해 유럽연합국을 비우호국가로 지정해 러시아 연주단체와 예술가들의 공연 비자 발급은 상당 기간 어려울 전망이다.

안나 네트렙코와 게르기예프. [사진 네트렙코 페이스북]

안나 네트렙코와 게르기예프. [사진 네트렙코 페이스북]

그러나 푸틴 지원과 무관하게 성취를 이룬 거물급 러시아 예술가들이 발언하면서 게르기예프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다. 체코 필하모닉 음악감독 세미온 비치코프를 필두로, 키릴 페트렌코 베를린 필하모닉 음악감독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교활한 공격이자 국제법 위반이며 전 세계 평화에 칼을 꽂는 일”이라며 푸틴을 맹비난했다. 베를린 필은 페트렌코와 함께 우크라이나 연대를 공식화하고 건물 외벽에 우크라이나 국기를 표시했다. 모스크바 태생의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은 “우크라이나 침공은 정당화 할 수 없는 범죄”로 표현했다. 볼쇼이 발레단 수석 무용수 올가 스미르노바 역시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며 아예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으로 이적했다.

우크라이나 국적의 예술가들도 공연계 우크라이나 연대에 나서고 있다. 그 주역은 옥사나 리니우 볼로냐 극장 음악감독이다. 2021년 역사상 첫 바이로이트 초청 여성 지휘자에 오른 리니우는 볼로디미르 젤린스키 정부 출범 초기 문화부 장관 입각을 제의받을 만큼 자국에서 탄탄한 인지도를 자랑한다. 우크라니아 전쟁 초기,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세계 예술가들이 공개적으로 우크라이나 지지를 표명해야 우크라이나는 생존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이에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 베이스 박종민이 국제 무대 활동 중에 소셜미디어 계정으로 우크라이나 지지를 표출하며 화답했고,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독주회 공연 전후반 무대 의상을 우크라이나 국기색에 맞춰 입으며 연대를 표했다.

손열음, 공연 때 우크라 국기색 옷

하지만 서방 세계가 전방위로 대러 제재를 공식화화면서 반전을 위한 연대 이외에 러시아 색을 무분별하게 지우려는 공연계 움직임은 우려를 낳기도 한다. 폴란드 대부분의 악단이 러시아 작곡가 작품 연주를 금지했고, 서방 각국에서 현지 시민 정서를 감안하여 공연 비자의 행정적 절차를 결부시켜 러시아 국적자의 초청 연주를 취소하고 있다.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는 볼쇼이 발레단 초청 공연을 취소했다.

이런 공연 취소는 상징적, 정서적으로 만족감을 줄 수 있지만, 사실 공연계 종사자들에게는 밥그릇이 걸린 문제다. 정작 스미르노바처럼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대하는 러시아 예술가들이 생계 위협을 받기도 한다. 프랑스 툴루즈 캐피털 오케스트라와 볼쇼이 극장 음악감독을 동시에 맡던 오세티야 출신의 지휘자 투간 소키예프는 전쟁 반대의 뜻과 함께, 망신주기용으로 공인에 입장을 요구하는 프랑스식 ‘캔슬 컬처(Cancel Culture)’를 비판하며 두 곳 음악감독 자리에서 모두 물러났다.

2022년 우크라이나 사태에 처한 예술계 분위기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 당시와 비교해 전혀 다르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예술지상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거대 권력이 필요하다며 푸틴-게르기예프의 후원-수혜 모델을 용인해 왔던 서방 세계가 그동안의 가치관을 반성하는 형태다. 일찌감치 게르기예프의 서방 세계 축출을 주장하던 러시아 반체제 인사 알렉세이 나발니의 호소에 서구 예술계가 뒤늦게 동참하는 셈이다. 푸틴 집권기 동안 러시아 예술의 정체성을 게르기예프가 대표하게 놓아두는 게 온당한가. 러시아 시민도 고민할 시점이다.

한정호 공연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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