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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월드컵 세대’ 유권자 분석]집값 잡고 남녀 갈등 해결하고 일자리 늘려라…“개인주의지만 이기적이지 않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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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0호 08면

SPECIAL REPORT

“평소 관심이 많았던 기후위기, 젠더 갈등, 사회적 소수자 문제를 고려해 투표했다. 유독 20대에서 성별 지지 후보가 갈렸던 결과를 보면서 젠더 갈등이 특정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해진 문제라는 점을 깨달았다.” (대학생 이모씨·23·여)

“현 정부의 내로남불 태도, 친북·친중 정책, 성평등 정책 실패를 바로잡고 싶다는 생각에 한 표를 던졌다. 과거 촛불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적을 심판했듯 이번 정부의 잘못도 바로잡겠다는 확고한 생각이 있었다.” (대학생 박모씨·21·남)

“이번 선거는 ‘뽑을 사람이 없는 비호감 선거’였다. TV 토론회에서도 대장동이 어쩌니, 도이치모터스가 저쩌니하며 서로 깎아내리기식 언급만 하는 것을 보고 많이 실망했고, 투표장에서도 이런 언행을 염두에 두고 한 표를 행사했다.” (대학생 김민주씨·24·여)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20세 전후의 청춘 남녀들이 대거 투표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2017년 5월 9일 치러진 지난 19대 대선 당시 투표권이 없었던 1998년 5월 11일생부터 이번에 처음으로 투표권을 얻은 2004년 3월 10일생까지다. 선거법상 투표일 다음날 태어난 사람도 투표권이 있다. 총 419만명 정도로 추산되는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지지 후보를 정했고,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을까. 중앙SUNDAY는 온라인 설문조사업체 엘림넷 나우앤서베이에 의뢰해 지난 11일부터 16일까지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한 유권자 218명을 대상으로 지지 후보를 정한 가장 큰 이유와 새 정부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에 대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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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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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에서 지지 후보를 정한 가장 큰 요인은 여가부 폐지 등 젠더문제(21.1%), 정치 개혁에 대한 기대감(17.9%), 평소 이념과 지지 정당(17%)의 순이었다. 부동산 정책 실패(13.8%), 실언·욕설 등 후보의 언행(12.4%)을 꼽는 의견도 있었다. 남녀별로는 우선 순위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남성들은 젠더와 정치 개혁, 부동산 순으로 투표 이유를 꼽았다. 대장동·주가조작 등 각종 비리도 주요 요인으로 생각했다. 반면 여성들은 평소 이념과 지지 정당을 가장 큰 요인으로 꼽았고 젠더문제, 정치 개혁 등이 뒤를 이었다. 이에 대해 박종희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첫 투표한 유권자들이 정치 개혁의 기대감으로 투표에 임했다는 건 특징이 아닌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 누구나 정치를 처음 접할 때 매력적이고, 맘에 쏙 든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기성 세대가 주도하는 정치 시스템에 불만을 갖거나, 답답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오히려 크다. 박 교수는 “젊은 유권자가 정치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개혁을 바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 명제”라며 “미국, 일본, 한국 어디든 마찬가지며 386·586도 모두가 겪어왔던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젊은 세대는 진보적이란 공식 깨져

19대 대선 당시 19세였던 선거 연령이 이번 대선에서는 18세로 낮아졌다. 대통령 후보들에게 첫 투표권을 행사한 이들은 보통 20대와 30대를 통칭하는 MZ세대 가운데서도 가장 젊은 세대이자 Z세대(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 사이 태어난 세대)의 맏이다. 온 국민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조차 이들에게는 영상으로 보고 들은 남의 일에 가깝다. 너무 어려서 기억하지 못하거나,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절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 고려하면 이들을 ‘포스트 월드컵 세대’라고 이름 붙일만 하다. 21세기에 태어난 유권자답게 이들이 대선에 임하는 태도는 지역이나 이념에 따라 ‘무지성 지지’를 하는 기성세대와는 전혀 달랐다. 유세 기간부터 젠더 문제가 가장 첨예한 갈등 요소로 떠올랐고, 젊은 세대는 대체로 진보적이라는 공식도 깨졌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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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20대 남성 10명 중 6명은 윤석열 당선인을 지지했다. 젊은 층의 과반수가 보수 후보를 지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반면 20대 여성은 10명 중 6명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를 지지했다. 성별 지지율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은 기성세대와는 달리 유독 젊은 세대에서만 성별에 따라 지지 후보가 달라진 것이다. 이처럼 기존의 보수·진보 담론을 무조건 수용하지 않았다는 점은 이번에 드러난 새로운 현상이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천안함 사건 이후 북한에 대한 시각이 변하면서 20대 초반의 보수화가 진행됐다”며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에서 이미 시그널은 계속 있었지만, 그게 본격적으로 선거를 좌우할 정도의 파괴력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젠더문제 역시 어느날 갑자기 불타오른 것이 아니다. 20대 초반 여성들은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또래 남성은 역차별을 받는다고 반발한 결과가 현실을 반영한 어젠다로 떠올랐다는 것이 박 교수의 진단이다.

외환위기 이후에 태어난 포스트 월드컵 세대는 우리나라 역사상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한 시기에 성장해 세계 10위권 안팎인 경제 대국의 국민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초~중학교 때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수학여행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인 동시에 중~고등학교 때 대통령 탄핵을 겪은 ‘촛불 세대’다. 또 코로나 확산으로 배낭여행과 미팅보다 온라인 비대면 수업에 더 익숙한 불행한 학번이기도 하다. 전체 인구의 8% 정도지만 태어날 때부터 PC·스마트폰과 친숙했던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이기 때문에 온라인상에서의 영향력과 파급력은 덩치보다 훨씬 크다는 특징이 있다.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빠르게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기성세대처럼 진보·보수로 평면적으로 재단해서는 안된다.

“억지로 만든 공공 일자리 원치 않아”  

이같은 성향은 차기 정부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한 응답에서도 드러난다. 포스트 월드컵 세대는 집값 급등 해소(23.4%), 남녀 갈등 해결(22.9%), 일자리 활성화(15.1%)의 순으로 응답했다. 경제적 양극화 해소(13.3%)와 저출산 고령화 문제 해결(10.6%)을 바라는 목소리도 작지 않았다. 남녀간에는 큰 차이는 없었지만 남성들이 저출산 고령화와 경제적 양극화 대책을 주문한 데 비해 여성들은 정치·검찰 개혁을 요구하는 비중이 높았다. 이같은 남녀간의 차이는 윤석열·이재명 지지자 간의 차이와 거의 일치했다. 남성은 윤 당선인, 여성은 이 후보 지지가 많았던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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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은 부동산 문제가 선거 과정에서 지지 후보를 정하는 데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것도 눈에 띈다. 두 후보가 모두 집값 대책을 내놓아 차별화가 어려웠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이념·정체성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적·합리적 성향인 포스트 월드컵 세대는 부동산·탈원전 등 거시적인 문제보다는 젠더 등 당장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활성화된 이슈를 보고 표를 던졌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포스트 월드컵 세대는 남녀별로 병역 문제와 남녀갈등 해소방안을 놓고 첨예하게 의견이 갈렸다.

젠더문제를 제외하고 기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는 오히려 온건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적립금이 고갈되는 국민연금을 어떻게 손봐야 할 것인지 묻는 질문에는 응답자의 31.2%가 지급 개시 연령을 더 늦추자, 25.2%는 평균소득의 40% 수준인 연금 지급 규모를 줄이자고 응답했다. 이광한(21·남)씨는 “지급 대상은 늘어나고, 적립금은 줄어드는 상황에서 연금액을 줄이거나 지급 연령을 늦추는 게 가장 현실적”이라며 “오히려 기타 복지제도에 투입되는 비용을 줄이되 연금을 유지하는 방안도 고려해볼만 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일자리 문제 해결 방안에 대해서도 51.8%의 응답자가 기업이 일자리를 많이 만들 수 있도록 지원을 강화하는 정책을 최우선 순위로 꼽았다. 문재인 정부가 중점적으로 추진한 공공부문 일자리 늘리기 정책에는 공감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성들은 고용시장 유연화를 통한 신규 취업 기회 확대를, 여성들은 주4일제 도입 등으로 일자리 나누기 추진이 시급하다는 쪽에 공감했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도 과반이 넘는 51.4%가 비정규직 제도는 유지하되, 차별을 없애도록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취업준비생 임현주(24·여)씨는 “20대 남성이든, 20대 여성이든 양질의 일자리 마련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한다”며 “억지로 일시적인 공공 일자리를 만들어봐야 우리가 원하는 안정적인 직장이 될 수 없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도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결과가 될 수 있어 찬성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북한, 적 아니지만 함께 갈 동포도 아냐”

정년 연장에 대해서도 젊은 세대가 부정적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현행 60세인 법적 정년을 연장하거나(49.1%), 현행대로 유지(32.1%)하자는 의견에 힘이 실렸다. 대학원생 이주희(25·여)씨는 “사회 안전망을 유지하고, 노인복지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정년 연장은 필요한 정책”이라며 “일할 수 있다면 일하게 하고, 그게 맞게 세금도 내도록 하면 오히려 청년들의 부담이 줄어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연금개혁, 일자리, 비정규직, 정년 연장 등에 대해서는 진영 논리에 따른 극단적인 대안보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개선을 요구하는 셈이다. 포스트 월드컵 세대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공정’인 만큼 사회문제에 더 공정하고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은 것이다. 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는 “포스트 월드컵 세대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분명히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기적인 세대는 아니다”라며 “오히려 그 어느 세대보다 개방적이고, 훨씬 공감 능력이 높은 세대이기에 그에 맞는 방식으로 사회 문제에 대응해나갈 수 있도록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런 성향을 보여주는 또다른 대목이 바로 이들의 대북·외교 정책에 대한 태도다. 기성세대가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강경책, 유화책으로 나뉘었다면 이들은 대화나 협상, 경제 제재 등 간접적인 수단으로 외교정책을 펼치길 원했다. 북핵 문제 해결 방안에 대해 응답자 중 35.3%가 외교를 통한 다자간 협상으로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을, 21.1%는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통해 비핵화를 유도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표어 아래 뭉쳤던 기성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다. 다만 남성들은 미국의 핵무기 공유 등을 통해 억지력을 강화하거나 국제 공조를 통한 경제 제재로 더욱 압박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동수 대표는 “기존의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대표적인 축이 대북정책이었지만, 포스트 월드컵 세대는 북한을 대결 상대나 적대적 상대로 인식하지도 않고, 반대로 함께 가야 할 동포라고도 보지 않는다”며 “평화의 중요성은 인지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 훨씬 피해가 적고, 효과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반영된 것”이라고 평했다.

이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이종훈 평론가는 “일자리 몇만개, 집 몇십만호 식의 공허한 약속을 믿는 젊은 세대는 없다”며 “차라리 특정 분야에서 몇명, 어느 기업에서 몇명하는 식의 구체적인 숫자를 제공하는 것이 훨씬 소구력 있는 정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캐스팅보터 역할을 한 포스트 월드컵 세대가 박탈감과 좌절감에 빠지지 않도록 차기 정부가 내세울 어젠다를 하루속히 내놓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박종희 교수는 “20대가 선거에 가장 많이 동원된 선거였지만, 역설적으로 20대는 선거로부터 해답을 찾지 못했다”며 “청와대 이전을 놓고 가장 중요한 임기 초반의 개혁 에너지를 소진하지 말고 젠더와 일자리 등 정책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해서 이들이 또다시 고민이나 울분을 해결하지 못하고 정치적 냉소층으로 돌아서는 것을 방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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