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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해외영화제 길 터 ‘K시네마 르네상스’ 첨병 역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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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0호 02면

[김동호 남기고 싶은 이야기] 타이거 사람들〈1〉거장 임권택

살다 보면 적지 않게 ‘우연한 기회’를 만난다. 기회는 한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기에 잘 포착해야 한다. 기회는 선택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 나 김동호(85·金東虎)의 경우 30년의 공직생활은 전자에 속하고 30년의 영화와 함께한 삶은 후자에 속한다. 선택한 기회든, 주어진 기회든 그 기회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뼈를 깎는 노력으로 최선을 다했을 때 ‘성취의 보람’을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각고의 노력은 창의력을 수반할 때 더욱 그 빛을 발휘할 수 있다. 어쩌면 베르그송의 말처럼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어 온 것’이 내 삶이었던 것 같다. 마치 역마살이 겹으로 낀 것처럼. 나의 호(號)는 청하(靑霞)이지만 사람들은 내 이름에 있는 호(虎)를 따서 타이거라 부르기도 한다. 타이거클럽 사람들과의 추억여행을 시작한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아다다’가 경쟁부문에 오른 1988년 몬트리올영화제에 참가한 김동호 당시 영화진흥공사 사장(가운데·현 강릉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과 임 감독(오른쪽), 여배우 신혜수(왼쪽). ‘아다다’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신혜수는 이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사진 김동호]

임권택 감독의 영화 ‘아다다’가 경쟁부문에 오른 1988년 몬트리올영화제에 참가한 김동호 당시 영화진흥공사 사장(가운데·현 강릉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과 임 감독(오른쪽), 여배우 신혜수(왼쪽). ‘아다다’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신혜수는 이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사진 김동호]

1988년 4월 나는 28년간 봉직했던 문화공보부를 떠나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만 하더라도 나는 ‘영화인’이라기보다는 공직자에 가까웠다. 공보부 7급 주사로 시작해 문공부 기획관리실장을 8년 동안 맡으면서 직·간접적으로 영화와 연을 맺기는 했지만 영화계가 ‘초짜배기’ 영진공 사장을 흔쾌히 맞아들일 거라는 기대는 그다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영화감독협회 같은 단체에선 사장 취임 반대성명까지 내기도 했으며 대놓고 사표 내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영진공 사장에 취임하자마자 임권택 감독의 영화 ‘아다다’가 캐나다 몬트리올영화제 경쟁부문에 선정되었다는 전문이 날아왔다. 당시 몬트리올영화제는 세계 8대 영화제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다. 배경을 확인해 보니 세르즈 로지크 집행위원장이 한국을 방문해 영진공 시사실에서 임 감독의 ‘아다다’를 보고 간 후 경쟁부문에 올렸다고 했다. 잘만 하면 수상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대표단을 구성, 현지에서 ‘한국의 밤’ 행사를 개최하기로 하고 8월 26일 먼저 몬트리올로 날아갔다.

몬트리올 동반 참석 뒤 가깝게 지내

그런데 시작부터 꼬였다. 대표단 구성 자체가 어려웠다. 요즘이야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한국 영화인들이 누비고 다니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로 여겨지지만 30여 년 전만 해도 사정은 사뭇 달랐다. 먼저 임 감독을 설득해야 했다. 지금은 임 감독과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절친’으로 지내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 둘은 낯선 사이였다. ‘아다다’의 주연 배우 신혜수도 KBS 드라마 ‘지리산’ 촬영을 하고 있어서 몬트리올영화제 참석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는 임 감독과 신혜수에게 그리고 KBS에 영화제 참가 협조를 신신당부했다.

내가 2010년 펴낸 『영화, 영화인 그리고 영화제』 책자에 당시를 회고한 임 감독의 ‘축사’의 한 대목. “김동호 사장이 진흥공사 직원들에게 감독과 주연배우를 꼭 데려와야 한다고 단단히 일러 놓고 떠났다는 소리를 전해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웃었다. 역대 영진공 사장 중에 해외영화제에 참가했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데다가 그들이 영화제에 온들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마 영화제를 핑계 삼아 관광이나 하자는 속셈이겠지 하는 불쾌한 생각도 들기도 했다.”

한국영화를 세계로 진출시키는 데 첨병 역할을 한 임권택 감독. 2005년 베를린영화제에서 명예황금곰상을 수상한 임 감독. [사진 김동호]

한국영화를 세계로 진출시키는 데 첨병 역할을 한 임권택 감독. 2005년 베를린영화제에서 명예황금곰상을 수상한 임 감독. [사진 김동호]

임 감독이 영진공이나 관리들에게 좋은 인식을 갖고 있지 못했던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한 해 전인 1987년 베니스영화제에 ‘씨받이’가 경쟁부문에 선정되었을 때 아무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영진공에서는 전문위원 한 사람이 임 감독을 모시고 베니스로 갔었고, 주이탈리아 한국대사 부부가 잠시 베니스에 들렀다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한다. 주연배우인 강수연조차도 자기가 출연한 영화가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것도 모르고 있었고, 임 감독도 영화제 도중에 일본에 약속이 있다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에 강수연이 호명되었을 때 남아 있던 전문위원이 무대에 올라가서 대리 수상했다. 3대 영화제(칸·베를린·베니스) 경쟁부문에 올랐는데도 막상 현장에선 이런 일이 벌어졌다니 지금으로선 상상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몬트리올에 도착해 박수길 주캐나다 대사에게 부탁해서 ‘한국의 밤’ 행사에 부부 동반해서 참석한 후 다음 날 아침 집행위원장과 조찬을 같이해 줄 것을 부탁했다. 문공부에는 천호선 주캐나다 공보관을 현지에 파견해 줄 것도 요청했다. 임 감독과 신혜수가 도착하자 내 대학 동기인 나원찬 주몬트리올 총영사는 공관에서 환영만찬을 베풀어 주었고 영사 1명과 차량을 전용으로 배치해 주었다.

심사위원과 함께 보는 공식 시사회 장소인 메종뇌브극장은 1400석의 대극장이었다. ‘아다다’가 상영될 아침 시간에는 관객이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몬트리올에 있는 한국 성당의 신부와 한인교회 목사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교민들이 함께 ‘아다다’를 보도록 공지해 달라고 부탁했다. 9월 1일 아침 11시에 열린 공식 시사회는 초만원을 이루었고 영화가 끝난 후 관객들의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그날 저녁 국악공연과 함께 열린 ‘한국의 밤’ 행사도 성공리에 개최됐다. 9월 4일 시상식에서 배우 신혜수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한국영화의 거장 임 감독은  올해로 데뷔 60주년을 맞았다. 그는 1962년에 개봉한 첫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시작으로 2015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특별 상영된 ‘화장’까지 모두 102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장편영화를 만든 감독 중의 한 명으로 기록된다. 제작 편수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영화들이 한국영화를 세계로 진출시키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잘 알다시피 지금 한국영화는 전 세계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2019년 칸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2020년 아카데미영화상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과 국제장편영화상 등 4개 부문을 석권했다. 배우 윤여정은 ‘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고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 게임’은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넷플릭스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면서 배우 오영수가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가 시상하는 골든글로브상 남우조연상을 탔다. 이처럼 우리 영화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그 바탕에는 임 감독의 공헌이 절대적이다.

한국영화가 베니스영화제에서 최초로 수상한 영화가 바로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다. 1987년 배우 강수연이 이 영화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임 감독은 가장 권위 있는 칸영화제에서도 길을 텄다. 경쟁영화가 상영되는 칸의 르미에르극장에서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인파와 쉴새 없이 터지는 카메라 프레시를 받으면서 레드카펫을 밟고 들어가는 것은 전 세계영화인의 로망이다. 그 로망을 실현시켜 준 첫 한국영화가 임 감독의 ‘춘향뎐’이다. 칸 역사 53년 만에 우리 영화 ‘춘향뎐’이 2000년 처음으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그리고 2년 후 임 감독은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받았다. 한국영화 100년사에 기록될 쾌거였다.

1981년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가 경쟁부문에 초청되면서 한국영화는 베를린영화제에서 수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임 감독은 2005년 베를린에서 명예 황금곰상을 받게 된다. 황금곰상과 명예 황금곰상은 그 격과 차원이 다르다. 영화제에서 대상은 작품성이 뛰어난 한 편의 영화로 받게 되지만 명예대상은 평생을 쌓아 온 공로로 받는 상이기 때문에 대상에 견줄 수 없을 만큼 영예로운 상이다.

이를 계기로 2012년 베니스영화제 ‘피에타’(김기덕)가 황금사자상을, 2019년 칸영화제에서 ‘기생충’(봉준호)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함으로서 한국영화의 위상은 전 세계에 떨치게 된다. 이처럼 임권택 감독은 한국영화를 전 세계에 알린 첨병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달빛 길어 올리기’에서 단역 맡기도

나는 몬트리올영화제에 처음으로 임 감독과 동반 참석하면서 그와 가까워졌고 지금까지도 그와의 소중한 인연을 이어 오고 있다. 그 이후 나는 임 감독이 연출한 ‘장군의 아들’ ‘서편제’ ‘창’ ‘축제’ ‘춘향뎐’ ‘하류인생’ ‘취하선’ ‘천년학’ ‘화장’ 등  거의 모든 영화 촬영 현장에 원근을 가리지 않고 가 보았고 ‘달빛 길어 올리기’에서는 직접 배우로 단역을 맡아 출연하는 호사도 누렸다. 특히 임 감독이 초대받은 해외영화제나 수상식, 회고전에는 빠짐없이 동행했다.

나는 34년간 임권택 감독과 함께하면서 그의 엄격한 성품과 철저한 장인정신에 늘 감탄하곤 한다. 함께 술을 많이 마셔도 주정을 하거나 필요 없는 말을 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스태프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만큼 엄격하다. ‘서편제’ ‘취하선’ ‘달빛 길어 올리기’에서 보듯 임 감독은 영화를 통해서 한국의 전통과 미를 끊임없이 추구해 왔다. 그가 세계적인 거장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유다.

김동호

김동호

김동호

1937년 강원도 홍천 출생
1956년 경기고 졸업
1961년 서울대 법대 졸업, 공보부 입부
1980~88년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
1988~92년 영화진흥공사 사장
1992년 예술의전당 초대 사장
1992~93년 문화부 차관
1996~2010년  부산국제영화제 창설 및 집행위원장
2010~16년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
2014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훈장 받음
2016~17년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 이사장
2019년 8월~ 강릉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 이사장

영화제 심사위원장
아시아태평양스크린어워즈(2015), 로테르담(1997), 도쿄필맥스(2006), 베오그라드(2008), 타르코브스키(2010), 오키나와(2009, 2010), 타이베이(2010), 말레이시아(2017), 히로시마(2017), 한국 청룡영화상(2004~2011)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아시아태평양스크린어워즈(2008, 2016),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부문(2010), 후쿠오카(1997), 싱가포르(1997), 하와이(1997), 인도(1998), 부에노스아이레스(1999), 시애틀(2002), 라스팔마스(2004), 예레반(2008), 사라예보(2008), 블라티슬라바(2010), 몬트리올(2011), 모스크바(2012), 유라시아(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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