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수첩의 비밀
브리지트 벤케문 지음
윤진 옮김
복복서가
남편이 아끼던 에르메스 수첩을 잃어버렸다. 더는 생산되지 않는다는 점원의 말에 이베이에서 좀 더 빨갛고 오래된 광택이 나는 같은 다이어리를 70유로에 산다. 그 속을 펼쳐본 저자는 전화번호 수첩에 적힌 이름들을 보고 전율한다.
콕토, 샤갈, 자코메티, 라캉, 아라공, 브르통, 브라사이, 브라크, 발튀스... 약 스무장짜리 작은 수첩에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위대한 예술가들의 이름이 알파벳순으로 나열돼 있었다. 수첩의 전 주인은 초현실주의와 현대 예술의 한가운데 있었던 인물이다.
저자는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탐사 보도로 훈련된 그의 손에 이 수첩이 쥐어진 것은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수첩의 전화번호부를 한 줄 한 줄 훑어가며 마침내 주인을 알아낸다. 피카소의 연인이자, 그림 ‘우는 여인’의 모델, 바로 도라 마르다.
도라 마르는 1907년 파리에서 태어나 사진작가로 활동했다. 20대 초반에 이미 패션과 광고 사진으로 이름난 작가였고, 소외된 사람들을 사진에 담는 르포 작가로도 활약했다. 초현실주의 한가운데서 전위적 사진으로 명성을 얻기도 한다. 그러다 1935년, 카페 뒤 마고에서 피카소를 만나고, 2년 뒤 ‘게르니카’를 그리는 6주 동안의 작업을 사진으로 기록하면서 피카소의 공식 연인이 된다.
당시 예술계에 왕처럼 군림한 피카소와의 우연한 만남을 ‘기획’하기 위해 도라 마르가 카페 뒤 마고에서 작은 칼로 손가락 사이를 자해했다는 일화는 놀랍다. 알려진 대로 피카소의 권유가 아니라, 자신의 그림에 대한 열망으로 사진을 버리고 그림을 택했다는 얘기 또한 의미심장하다.
그림 ‘우는 여인’에 대해 “카프카적 인물이야. 모든 희생자, 전쟁과 남자들이 낳은 희생자의 상징이지”라고 했던 피카소의 말에 갇혀 일그러진 여자는, 1930년대 파리를 거닐며 예술가들과 교우하고 20세기 현대 예술의 중심부에서 극적인 삶을 살았던 다면적 인물로 다시 탄생한다.
구글과 위키피디아 사이를 헤매며 무덤같이 고요한 수첩을 뒤적이던 저자는 ‘우는 여인’만으로만 남기를 거부한 다면적 초상의 한 여성을 발굴해냈다. 미스테리한 이름과 이름을 엮고, 배관공·건축업자 등 현실에 사는 사람들의 시간을 훑고, 그래도 메워지지 않을 땐 개연성 있는 추측을 더해 만든 한 편의 입체화는,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