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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부터 어긋났다, 신구권력 인사권 충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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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6일로 예정됐던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오찬 회동이 무산됐다. ‘87년 체제’ 이후 현직 대통령과 당선인이 만남을 예고한 뒤 불발된 건 처음이다. “권력 교체기 신구 권력의 충돌”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청와대와 당선인 비서실은 이날 오전 8시 동시에 “예정됐던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의 회동은 실무적 협의가 마무리 안돼 일정을 다시 잡기로 했다”며 “실무 차원에서 협의는 계속 진행해 나갈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오찬까지 불과 네 시간을 앞둔 시점이었다. 이철희 청와대 정무수석과 장제원 당선인 비서실장이 이날 회동에서 의제로 올릴 내용을 미리 조율해 왔는데, 그게 마무리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일정을 미룬 이유와 이견에 대해선 양측 모두 “비공개하기로 합의했다”며 침묵했다. “회동 ‘무산’이 아닌 ‘연기’가 정확한 표현”이란 입장도 같았다.

완전 무산은 아니더라도 이미 언론에 회동 일정을 공개한 뒤 연기한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다. 역대 대통령과 당선인은 겉으로는 화기애애하게 회동하는 모습을 연출해 왔다. 가장 최근이었던 2012년 12월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40여 분 만남과 2007년 12월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의 130분 만찬도 그랬다. 정중하게 서로를 대하는 모습이 공개됐다.

정치권에선 회동 연기에 대해 다양한 추측이 나온다. 인사권과 사면권을 둘러싼 갈등이 주로 지목됐다. 실제로 “결국엔 인사 문제 아니겠냐”는 얘기가 윤 당선인 측에서 흘러나왔다.

정권 이양기임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 출신 인사가 임기가 보장되는 공공기관 임원으로 자리를 옮기자 국민의힘에선 “알박기”란 비판이 나왔다. 윤 당선인 측이 청와대에 ‘공공기관 인사 협의’를 요청했는지를 놓고선 “요청한 상태”(김은혜 당선인 대변인)와 “요청이 있었는지 여부를 모른다”(청와대 핵심 관계자)로 말이 엇갈리기도 했다.

여권, MB 사면에도 부정적 … 오찬 4시간 앞두고 전격 연기

또 전날엔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이 “김오수 검찰총장이 거취를 스스로 결정하라”고 했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위원장인 권영세 의원도 언론 인터뷰에서 “정치적으로 임명된 (공공기관) 직원은 스스로 거취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또한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공공기관 낙하산 인사 전수조사’에 나섰다. 그러자 청와대에선 “불쾌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16일 오후 라디오 인터뷰에서 “(공공기관 인사는) 필요한 건 만나서 협조하고 조율할 게 있으면 하게 될 것이고, 두 분의 대화 속에서 서로 의견이 잘 반영되리라 믿는다”면서도 “임기가 남은 경우가 있는데, 임기는 (법대로) 보장돼야 한다”고 했다.

구체적으로는 이달 31일 임기가 만료되는 한국은행 총재 인사 문제에 대해 이견이 노출됐을 수 있다.

간극 커지는 신·구권력의 입장차.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간극 커지는 신·구권력의 입장차.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통화정책을 수립하는 한국은행은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특히 부동산 문제 해결이 제1 과제인 차기 정부 입장에선 한국은행이 행정부와 보조를 맞추지 않고 기준금리를 정할 경우 정책 운용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당초 청와대는 한은 총재 후보자 지명을 윤 당선인 측과 상의하겠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날 기자들을 만난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분명한 것은 5월 9일까지는 문재인 정부의 임기다. 임기 내 주어진 인사권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강조했다. 중앙선관위 상임위원과 감사원 감사위원도 갈등의 소지가 있다.

당초 회동의 주요 테마 중 하나는 이명박(MB) 전 대통령의 사면 문제였다. 이와 관련, 장제원 비서실장은 이날 기자들에게 “사면 결정 권한은 대통령에게 있고, 그런 것으로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박수현 수석도 사면과 관련해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게) 하려고 독대를 제안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면 문제가 회동 무산의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더 많다. 회동 일정이 잡히기 전부터 “윤 당선인이 MB 사면을 건의하면 문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 양측에서 함께 나왔다.

하지만 권성동 의원이 “문 대통령 최측근인 김경수 전 경남지사를 (MB와) 동시에 사면하기 위해서 (지난해 12월 박근혜 전 대통령만 사면하고 MB는) 남겨놓은 것”이라는 ‘MB-김경수 바터설’을 제기하면서 기류는 바뀌었다. 즉각 사면권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는 원론적 입장이 청와대 일각에서 나왔고, 여권 내부에서도 “사면은 정치적 거래의 수단이 아니다”(노웅래 민주당 의원), “패키지로 (사면)하는 것을 검토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박광온 민주당 의원)는 부정적 반응도 제기됐다.

심지어 MB 사면 자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여권에서 불거졌다. 이탄희·양이원영 의원 등 초선 18명은 이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명박 전 대통령 사면에 반대한다”며 “사면이 필요하다 생각되면 (윤 당선인이) 대통령이 된 뒤에 직접 책임 있게 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현 여권에선 회동 전에 미리 의제를 정하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청와대 출신 민주당 의원은 “대통령과 당선인이 무슨 영수회담을 하듯이 조건을 걸고 ‘이게 안 되면 안 만나겠다’고 하면 어떻게 만나겠느냐”고 했다. 친문재인계 중진인 김태년 민주당 의원은 “사면이니, 인사 협조니 줄줄이 회동 조건을 달고 마치 압박하는 듯한 모양새 아니냐. 대단한 결례”라고 했다.

이날 회동은 무산됐지만 조만간 만남이 성사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양측이 문구 조율을 통해 같은 시간에 ‘연기’를 발표하는 등 보조를 맞췄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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