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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성탁 논설위원이 간다

"집값 고통에 줄곧 찍던 민주당 심판, 지방선거는 별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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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울 강북구 수유역 인근 횡단보도에 윤석열 당선인의 당선인사 현수막과 낙선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현수막이 나란히 걸려 있다. 김성탁 기자

서울 강북구 수유역 인근 횡단보도에 윤석열 당선인의 당선인사 현수막과 낙선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현수막이 나란히 걸려 있다. 김성탁 기자

0.73% 포인트 승부 가른 서울에선 무슨 일이…

20대 대선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당선인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표차는 24만7077표(0.73%)였다. 양당 텃밭인 호남과 대구·경북(TK)은 투표율과 지지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높았다. 투표율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부산·울산·경남(PK)에선 이 후보가 40% 안팎을 득표했다. 영남과 호남만 비교하면 윤 당선인이 이 후보보다 더 얻은 표는 20만여 표다. 충청과 강원에서도 윤 당선인이 앞섰지만, 경기도지사를 지낸 이 후보가 인구가 가장 많은 경기에서 5%가량 우세해 상쇄할 정도였다.

 이번 대선의 관건은 그래서 서울 표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윤 당선인이 서울에서 이 후보을 앞선 표차는 31만여 표. 전통적인 지역 대결 구도가 승부를 가른 게 아니라면 대선을 결정지은 서울 유권자는 어떤 판단이었을까.

 역대 선거에서 서울 강남권은 국민의힘 계열이, 서남부 구로·금천·관악구 등에선 민주당 계열이 우세를 보여왔다. 이번에도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추세였다. 서울 동북권 ‘노·도·강’(노원·도봉·강북구) 역시 민주당 강세 지역으로 꼽혀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노·도·강에서 이 후보가 앞서긴 했지만 표차가 크지 않았다. 민주당 지지 경향에 균열이 생겼다는 의미다.

 신승한 국민의힘이나 석패한 민주당이 선거 결과에 대한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유권자의 속내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서울 동북권을 찾았다. 그동안 줄곧 민주당을 지지하다 이번 대선에서 2번을 찍은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민주당이 기대를 많이 했을 중년층이다. 이들은 하고 싶은 말이 쌓였던 듯 20~30분간 열변을 토했다.

“자녀들이 살만한 나라 만들어야”

 지난 12일 노원구 상계주공3단지 아파트 입구에서 김모(58)씨가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화물차 운전을 하며 전국을 돈다는 김씨는 경남 함안 출신으로, 오래전 서울로 올라왔다. 성북구 빌라가 재건축에 들어가면서 이곳 전세를 얻어 이사 왔다. 이전 선거까지 줄곧 민주당을 지지해왔다는 그는 부동산값 얘기부터 꺼냈다.

 “서울 변두리가 대개 그렇듯 여기는 다소 형편이 어려운 서민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해 만들어진 곳이에요. 제가 23평짜리 전세를 얻으며 등기부 등본을 봤더니 매입가가 1억8000만원이었는데 지금 8억쯤 합니다. 이 정도 규모면 젊은 신혼부부나 어린아이가 있는 가족이 사는데, 집값이 오르니 전세비도 올랐죠. 저희 부모님 사시는 성북구 25평형 아파트도 전세가 4억5000만원이에요. 과연 30대가 10년 일한다고 그 돈을 모을 수 있겠어요? 정말 숨이 막히는 거죠.”

영·호남 등 득표차 경기서 상쇄, 윤석열 서울서 31만표 앞서

민주당 강세지역 '노·도·강'도 이탈 현상 "집값만 오르면 뭐하나"

"오죽하면 탄핵된 당을 누가 5년 만에 찍겠나. 민주당 반성해야"

“당선인의 검찰 이용 사정 안돼" "바른소리 하는 사람 경청하길"

 재건축 중인 아파트가 있으니 시세 급등으로 김씨로선 자산이 불어난 게 아닐까. 하지만 대답은 달랐다. “재건축 분담금을 내기 때문에 따져보면 몇억 정도 이익일 겁니다. 하지만 물가가 다 오르고 세금도 많이 걷잖아요. 그걸 떠나서 3남매를 뒀는데 아들이 결혼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애 하나 키우는데도 몇억이 든다는데, 최소 10년은 벌어 주거라도 해결해야지 무슨 수로 결혼하느냐는 거에요. 국가부채도 늘어 아이가 월급 300만원 받으면 세금도 앞으로 더 많이 낼 거 아닙니까. 난 집값 안 오르고 자녀들이 살 만한 나라가 되면 좋다는 겁니다. 부모 입장에서 이 정권은 너무한 거죠.”

 김씨는 "윤 당선인이나 국민의힘이 좋아서가 아니라 민주당에 열 받아 2번을 뽑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서민들 사정 모른 채 잘난 척하고, 이번에도 제대로 자성하지 못 하면 과거 한나라당 꼴 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서울 노원구 상계주공3단지 인근 상가를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민주당 강세지역이던 서울 동북권에서는 이번 대선 때 이탈 현상이 나타났다. 김성탁 기자

서울 노원구 상계주공3단지 인근 상가를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민주당 강세지역이던 서울 동북권에서는 이번 대선 때 이탈 현상이 나타났다. 김성탁 기자

 상계주공5단지 아파트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대화를 나누던 안모(53)씨 부부도 그동안 민주당에 투표해왔다고 했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 친구나 운동 동호회 등에서 지지 성향을 놓고 싸움이 날 뻔할 정도여서 정치 얘기를 안 했다고 한다. 안씨는 “이곳서 20년가량 살고 있는데 윤석열 후보가 근처에 왔을 때 난리가 났었다. 여기서 그런 장면은 처음 봤다”고 말문을 열었다.

 아내 이씨(49)와 맞벌이를 해온 그는 소유한 아파트값이 18년 만에 처음 올랐다고 했다. 그런데도 현 정부 부동산 정책에 불만이 많았다. “집값이 올라 좋았는데 세금을 과도하게 물리고 다주택자 양도세도 무겁게 했잖아요. 오른 만큼 세금 내는 건 괜찮은데, 투잡 쓰리잡 하며 열심히 일한 사람들을 투기꾼 취급하는데 반감이 들었어요. 양도세를 완화해줘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해줬어야죠.” 이씨는 주변 애들 엄마들도 전셋값 폭등 얘기를 많이 했다고 귀띔했다.

“윤 당선인 상식과 공정에 기대”

 안씨는 윤 당선인에게 표를 던진 다른 이유로 ‘공정’을 꼽았다.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 세대는 전두환 정권도 겪어봤는데, 민주당이 진보라면서 국민 정서를 무시하고 자기들 위주로 하는 걸 보며 옛날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어요.” 안씨는 “여기가 다 민주당 텃밭이고 탄핵을 당한 ‘박근혜 당’을 누가 찍겠느냐”며 “정권이 바뀌어 5년밖에 안 됐는데 오죽하면 돌아섰겠는지 민주당은 곱씹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내 이씨는 “민주당의 ‘내로남불’도 마음을 돌리게 한 원인”이라며 “문재인 대통령이 사람은 좋지만 국민 의식을 잘못 파악했고 주변 사람도 잘못 쓴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러면 윤 당선인에게 바라는 점은 무엇일까. 김씨는 “이왕 대통령이 됐으니 가족을 지켜줄 수 없다는 가장의 불안을 알고 집값 문제만 해결해주면 좋겠다”며 “국민연금 등 젊은 세대가 짊어져야 할 짐도 덜어달라”고 주문했다. 안씨는 윤 당선인에 대해 “배짱과 강단이 있고 리더십도 있어 보이는데 참모를 잘 써야 한다”고 했다. 이씨는 “행정 경험이 없어 윤 당선인도 욕을 많이 먹을 것”이라며 “국민의힘도 이준석 대표 한 명 내세워 젊은 피를 수혈했지만, 기득권을 타파하지 못해 변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고 혹평했다. 그러면서 “금태섭 전 의원처럼 바른 소리를 잘하는 사람 얘기를 잘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후보를 지지했다는 주민들도 많았다. 강북구 수유시장에서 만난 김모(59)씨는 “난 아직도 정신이 나간 것 같다”며 “민주당에도 이미 기득권이 된 이들이 있고 사회 지도층끼리 다 연결돼 있어서 강력하게 개혁하지 못한 게 패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부동산 문제 때문에 과거 민주당을 찍었던 이들 중에도 이번에 투표하지 않은 이들이 있다”며 “하지만 지금 부동산이 하락세를 보이는데 윤 당선인이 정책을 잘못 썼다가는 다시 오를 수 있는 만큼 신중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그는 “평생 검찰에만 몸담은 윤 당선인이 검찰을 이용해 누구를 골라 사정하려 들까 봐 그게 가장 걱정”이라며 “당선된 만큼 국민 화합을 하려면 그걸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노원역 근처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채모(36)씨는 이 후보에게 표를 줬다면서 “유세를 하러 온 걸 봤는데 윤 후보 측은 내내 상대방 약점만 내세우고 이 후보 측은 그래도 미래를 어떻게 하겠다고 말하더라”며 “윤 당선인이 통합하겠다고 했으니 선거 때와는 다른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2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 때 어느 당을 찍을 거냐는 물음에 대한 반응은 흥미로웠다. 민주당을 지지하다 윤 당선인을 찍었던 50대들은 모두 “대선과 지방선거는 별개”라고 말했다. 김씨는 “잘못한 만큼 대통령과 여당은 바꿔야 하니 2번을 찍었지만 지방선거는 민주당을 찍을 것”이라고 했다. 안씨 부부는 “대선과 달리 지방선거는 지역을 잘 알고 일을 잘할 것 같은 후보를 뽑을 것”이라고 답했다. 30대 채씨는 대선 직후인 이번 서울시장 선거 등과 관련해선 “과거엔 민주당을 줄곧 찍었는데 아직은 누구를 찍을지 모르겠다”며 “후보가 나오면 생각해보겠다”고 여지를 뒀다.

 접전이 치러진 대선에서 서울 민심은 한쪽으로 확 쏠리지는 않은 모양새다. 잘못한 정권은 심판했지만 그렇다고 이긴 쪽을 대안으로 미더워하지도 않았다. “예전처럼 무조건 어느 쪽이라는 건 약해진 것 같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그렇더라”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 선거가 끝났지만 오히려 이번 대선은 정치 세력을 출발선에 세우고 경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라는 총성을 울린 게 아닌가 싶다.

김성탁 논설위원

김성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