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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남이’가 여가부 폐지 논란을 본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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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수진 투데이·피플팀장

전수진 투데이·피플팀장

광화문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전시된 노면전차 381호. 1960년대 서울 도심을 달렸던 이 전차 복원 전시물 앞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복잡하다. 전차 밖엔 헐레벌떡 달려온 엄마와 딸이 서서, 전차 안 남학생에게 도시락통을 건네고 있다. 누이도 취학 연령으로 보이지만, 그는 곧 통학 아닌 출근 전차를 타지 않았을까. 오빠 또는 남동생 학비를 위해, 노(래를)찾(는)사(람들)의 ‘사계’를 흥얼대며 재봉틀을 돌렸겠지. 세월 흘러 1992년엔 드라마 ‘아들과 딸’을 본방사수하며 최고 시청률 61.1%에 한몫했을 터. 그 누이 자신이 배우 김희애씨가 열연한 주인공, 시대의 후남이었으니.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서울역사박물관 앞의 명물. 1960년대 실제 운행했던 노면전차를 복원했다. 함께 복원된 당시 가족의 시대상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수진 기자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서울역사박물관 앞의 명물. 1960년대 실제 운행했던 노면전차를 복원했다. 함께 복원된 당시 가족의 시대상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수진 기자

반세기가 지난 2022년. 후남이들의 자식 일부는 일명 ‘이대남’으로 장성했다. 이들 중 일부는-전부가 아님을 강조한다-이제 후남이를 위한 성평등 정책은 필요 없다고, 그 부처도 수명을 다했다는 주장을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 관철시켰다. ‘빨리빨리’의 나라인 한국이라서 그럴까. 조선왕조 500년 동안 장옷으로 얼굴만 내놓지 않고선 외출할 수 없었고, 60년대엔 ‘귀남이’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재봉틀을 돌렸던 한국 여성들은 이제 특혜를 누리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기득권처럼 표현된다. 어지럽다. 드라마 속 후남이는 친모에게 “귀남이 앞길 막을 X”라는 욕을 들었는데, 21세기 귀남이들도 맥락은 달라도 결국 같은 생각인 걸까.

‘페미니스트’ 단어는 이 나라에서 금기어다. 윤 당선인 측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입장 번복 자료를 냈다. 나라 밖 사정은 다르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라는 책은 여전히 필독서다. 버락 오바마 전 미 대통령은 “21세기 페미니즘은 (남녀) 모두의 평등과 자유를 위해 필수”라고 수차례 기고 및 연설을 하고 있다. 그의 말이 맞다고 쓰는 이 글을 오독한 이들은 “(특정 신체 부위를) 펜치로 훼손하겠다” “네 서방에게나 잘하라”는 댓글을 또 달고 익명 이메일을 또 보낼 거다. 그래도 계속 쓴다. 이유는 하나다. 분열 아닌, 통합을 위해서. 분열의 현재를 있는 그대로 목도해야 통합의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목소리 큰 소수가 침묵하는 다수를 더는 대표하지 않았으면 한다.

여성가족부 영어 명칭은 ‘양성평등부(Ministry of Gender Equality)’다. 개명 대신 폐지 밖엔 답이 없을까. 외신에서 때로 ‘목이 꺾일 만큼 빠른 속도로(at breakneck speed)’라고 표현하는 빠른 경제성장을 일군 건 귀남이와 후남이, 남녀 모두의 공이다. 2022년의 일명 이대남은 1960년대 전차 앞 소녀를, 일명 이대녀는 현재 이대남의 마음을 역지사지해볼 순 없을지. 뭐든지 빠른 이 나라에서 양성평등만큼은 더딘 이유를, 전차 381호 앞을 지나며 곱씹는다.